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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의 틈

신기술 없이도 가능한 혁신

히트작 <스탠바이미>가 찾아낸 '생각의 틈'

by K Duck

LG전자는 신기한 회사입니다. 글로벌 기업으로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수많은 실패로도 유명합니다. 한때 글로벌 경쟁력이 상당했던 휴대폰 사업이 아이폰 쇼크를 겪으며 결국 2021년 6월 스마트폰 사업을 접는 결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누적 적자 5조 원이 넘는 골칫거리 사업을 접고 비교 우위가 있는 스마트 가전과 전장 부문에 집중한 4년 전의 결정은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LG전자는 2024년 매출액이 전년 대비 6.6% 성장한 87조 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영업이익은 일부 감소했으나, 4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 '피봇'이 이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사업 포기 직후 출시한 LG전자 신제품이 27인치 TV?


디지털 라이프의 핵심 IT기기인 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한 지 2개월 후인 2021년 8월, LG전자는 의외의 신제품을 발표했습니다. 27인치 크기의 이동식 TV <스탠바이미>라는 제품이었죠. TV 치고는 작은 크기인 27인치 디스플레이에 4K 해상도의 1/4 수준인 Full HD로 구동되는 이 제품의 출시 가격은 무려 109만 9천 원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 출시를 알린 기사의 댓글에 달린 혹평들이 생생합니다. 40인치대 4K TV 보다 비싼 가격에 화질마저 구린 제품을 누가 사겠냐는 반응이 주를 이뤘습니다. 게다가 무선으로 사용 가능한 이동성이 장점이었지만 2시간 남짓한 배터리 타임도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출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지던 혹평은 엄청난 찬사로 바뀌었습니다. 구매자들의 생활 패턴을 통째로 바꿔놓은 혁신적인 가전제품이라는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1인 가구의 폭발적 증가와 공중파, 케이블 중심에서 OTT로의 시청 패턴 변화도 <스탠바이미>의 성공에 힘을 실어주었죠.


<스탠바이미 2>는 기존 제품의 아쉬운 배터리 타임을 4시간까지 늘려 고객의 니즈를 정확하게 해결하고 있다. (출처 : LG전자 홈페이지)


2025년 2월, 4년 만에 <스탠바이미>의 두 번째 버전이 출시되었습니다. 지난 5일 진행된 사전 판매에서는 30분 만에 완판 될 정도로 인기가 여전합니다. 현재 LG전자 홈페이지(www.lge.co.kr)에서 예약하면 최대 2개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입니다.


최신 IT 기술을 모두 동원하지 않은 이 작은 TV <스탠바이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한 1인 가구의 급증? OTT 중심의 시청 트렌드 변화?


<스탠바이미>는 신기술 없이 어떻게 혁신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스탠바이미>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스탠바이미>가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유는 바로 '귀차니즘'이라고 해석하려 합니다.


'귀차니즘' 단어를 탄생시킨 웹툰 스노우캣의 한 장면 (출처 : 웹툰 '스노우캣')


<스탠바이미> TV가 기존 TV와 가장 차별되는 점은 전원 케이블이 필요 없는 이동성입니다. 잘 만들어진 거치대를 잡고 집안 어디로든 자유롭게 이동하며 콘텐츠를 볼 수 있는 '모바일 TV'인 거죠. 하지만 '모바일 TV'라는 개념은 이해가 되는데, 이게 '귀차니즘'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스탠바이미>로 인해 새로운 TV 카테고리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이동형 TV'입니다. <스탠바이미> 덕분에 TV를 이동식 스탠드에 설치해 사용하는 고객이 급증했고, 여러 기업들이 이동식 스탠드를 만들어 <스탠바이미>보다 큰 화면과 좋은 해상도를 가진 TV와 결합한 조립식 '이동형 TV'가 넘쳐났습니다. 이들은 일명 <삼탠바이미>, <엘텐바이미> 등으로 불리며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수의 고객들은 <스탠바이미>로 되돌아왔습니다. 바로 전원 케이블의 불편함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스탠바이미> 절반 가격으로 더 큰 화면과 높은 해상도를 얻었지만, '번거로움'이라는 단점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거실 소파에 누워서 보던 OTT 콘텐츠를 침실로 이동해서 보려면 <삼탠바이미>는 ①TV를 끄고 → ②전원 케이블을 뽑은 다음 → ③침실로 TV를 옮겨 → ④침실 벽의 콘센트에 연결한 뒤 → ⑤TV를 다시 켜야 하는 번거로운 5단계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에 반해 <스탠바이미>는 ①TV를 침실로 이동시키는 단 한 가지의 과정만 거치면 시청 중인 콘텐츠를 중단하지 않고도 계속해서 감상할 수 있죠. 심지어 화장실에 용무를 볼 때도 살포시 이동시켜 끊김 없는 감상이 가능한 스마트폰, 태블릿과 유사한 극강의 이동성이 보장되죠.


<스탠바이미>가 침실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의 편리함 (출처 : 유튜버 '썬쑈' 콘텐츠 캡처)


이런 '귀차니즘'을 한 번에 해결해 준 <스탠바이미>가 인기를 얻은 건 당연했습니다. 게다가 자주 잃어버리거나 찾기가 어려운 TV 리모컨도 필요 없습니다. <스탠바이미>는 TV 스크린에 터치 입력이 가능하니까요.


이처럼 LG전자는 <스탠바이미>를 이동형 1인용 TV라는 콘셉트로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4년간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해상도는 한 단계 높이고(QHD), 배터리 수명을 늘린 <스탠바이미 2> 역시 예상대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새롭게 발표한 <스탠바이미 2>는 액세서리를 이용해 벽에 걸어 사용할 수 있는 극한의 활용성을 추가했다. (출처 : LG전자 홈페이지)


'생각의 틈'을 발견한 LG전자의 미래는?


가전에 집중한 LG전자는 최신 기술보다 고객의 니즈 해결에 중점을 둔 흥미로운 제품들을 계속 선보이고 있습니다. 휴대용 프로젝터의 끝판왕 <시네빔 큐브>, 스마트 식물 재배기 <틔운>, 세계 최초의 캡슐형 수제 맥주 제조기 <홈브루>가 대표적입니다.


지금은 가전제품의 한 카테고리를 차지하며 높은 보급률을 자랑하는 <스타일러>도 신기술을 적용했다기보다는 직장인들의 니즈를 현명하게 해결해 주는 아이디어 제품이었기에 가전제품의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귀차니즘’을 해결해 스마트폰의 실패를 대체한 LG전자의 다음 신제품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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