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의 틈

데자뷰에서 뷰자데를 보기

구두쇠 사용 설명서

by Gemma Han

저는 석사 때 <서비스 디자인>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누군가 그게 무엇이냐 물으면 '서비스를 잘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콩으로 메주를 쑤는 듯한 답을 하거나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다음 사진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IMG_1251.jpg 제발 당겨 주세요


이 사진은 수 년 전 '당기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 과 같은 캡션과 함께 돌아다녔던 사진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 한국인이 당기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읽을 수 없어서는 아닐 겁니다.

특히 저 가게의 경우라면, 문 앞에 당기라는 말이 두 배 더 써 있었더라도 여전히 밀고 들어서는 손님으로 곤혹을 치렀을 거라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름 대학원에서 공부한 가락을 동원하여 보자면, 가장 큰 문제는 저 동그란 손잡이의 형태와 크기, 그리고 위치에 있습니다.


허리께에 위치하는 저 둥그렇고 무거운 손잡이를 보면 어떤가요. 좌측 어깨와 함께 좌측 골반을 이용하여 밀고 들어가기 딱 좋게 생겼습니다. 당기라는 주인의 디렉션대로라면 무거운 원반과 같은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끌어 당겨야 하는데, 힘도 들고 이만저만 번거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당기라고 써놓고 슬쩍 밀면 밀리는 문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제 결론은 '손잡이가 잘못했네' 입니다.

손님이 당기고 들어오기를 원한다면 '당기고 싶은' 손잡이가 필요합니다.

명명백백한 욕구를 유발시켜주는 거죠. 다음 사진처럼요.

image.png https://medium.muz.li/designing-for-forgiveness-9538f26bf039

왼편은 잡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미는 행동이 따라올 테고,
오른편은 어엿한 손잡이를 잡고 당기는 행동이 따라올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개념을 어포던스(affordance)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행위 유발성’, 또는 ‘행동 유도성’이라고도 하는데요. 대상의 어떤 속성이 유기체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거나 특정 행동을 쉽게 하게 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딱 보면 그러고 싶게 생긴 것을 말합니다.


이 용어는 인지심리학자 James Gibson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UX의 아버지(!) Don Norman이 저서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에서 언급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낮고 평평한 것이 있으면 ‘의자’라고 쓰여있지 않아도 가서 앉고 싶고, 반지를 보면 무심코 손가락에 끼워보는 행동들이 그 사물들에 내재된 어포던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싶다면, 그것이 문이든, 스위치든 좋은 어포던스를 넣어서 디자인되어야 할 겁니다.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이기 때문입니다.


인지적 구두쇠 덕에 우리는 쉬운 의사결정을 선호하고 때문에 고민을 덜어주는 UI와 UX를 선호합니다.

우리가 어떤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면 인간의 인지를 계속해서 고려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5-02-12 16 57 49.png


그럼, 이번에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고객들에게는 이처럼 사용성이 뛰어난 서비스를 제공해야겠지만, 이를 제공해야 하는 입장은 어떨까요.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같이 창의적인 문제해결을 해야 하는 우리 개인은 오히려 인지적 구두쇠를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늘 하던대로', '편한대로'는 창의적인 의사결정과 대치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창의성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인지적 구두쇠를 괴롭히는 방법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바로 낯설게 하기입니다.


이는 제 안의 인지적 구두쇠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어, 익숙함 속에 묻혀 있던 새로운 시선을 끌어내려는 전략입니다. 뇌가 “잠깐, 이건 평소랑 다르네?” 하고 의아해하는 순간이 오히려 창의적인 발상이 솟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요. 그리고 이 방식은 커다란 변화가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오른손잡이임에도 가끔 왼손으로 양치를 합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그 순간 “원래 당연하다고 느꼈던 몸의 움직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죠. 혹은 늘 다니던 출퇴근 경로 대신 주변 골목길을 돌아서 가보거나, 평소에 즐겨 듣던 음악 대신 전혀 듣지 않던 장르를 일부러 골라 듣기도 합니다. 이렇게 ‘낯설고 불편한’ 상황을 만들면, 하루 중 짧은 시간이지만 뇌가 자동으로 처리해왔던 사고 패턴이 잠시 깨집니다.


실무 현장에서도 유사한 원리를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늘 이 방식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의도적으로 반대되는 접근법을 시도해 보거나,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툴을 써보는 겁니다. 어쩌면 당장 답답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낯설음 안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낯설음이 곧 우리의 인지적 구두쇠를 흔들어 깨울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럼 몇가지 조직에서 써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제가 코칭 중인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1. 리더 / 팀원 역할 바꿔 보기

보통은 CEO나 창업가 자신이 안건을 주도하고 팀원이 의견을 제시하겠지만, 의도적으로 팀원 중 한 명을 ‘가짜 CEO’로 지정해서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을 시뮬레이션해 봅니다.

‘가짜 CEO’가 질문하고 판단을 내리도록 두고, 실제 대표나 경영진은 오히려 참견을 줄이거나 반대 토론만 담당해보세요.

대표가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처럼 '이 업무의 목표가 무엇인가요?'와 같이 새삼스레 기초적인 질문을 던져 봅니다.

평소라면 모두 당연하게 여기던 결론이,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2. 정반대 시나리오로 논의해 보기

“우리 서비스가 대박이 날 거야!”가 아니라, 일부러 ‘망했을 때의 가정’을 두고 토론합니다.

"망한다면 그 이유는?" “만약 배포 이후 사용자 수가 전혀 오르지 않는다면?”, “만약 경쟁사가 똑같은 기능을 더 저렴하게 내놓는다면?” 같은 극단적 상황을 시나리오로 잡고, 대응책을 생각해 봅니다.

불편한 상상·가정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위험요소를 더 빨리 발견하고, 오히려 창의적인 대안을 찾게 됩니다.

3. 과정·행동을 낯설게 만들기

‘엉뚱한 메타포'를 가져다 현재 풀어야 할 문제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영역(예: 자연 생태계, 축구 경기 전략, 우주 탐사 등)에 비유해 토론합니다.
예: “만약 우리 제품이 정글 생태계 한가운데 있다면, 경쟁자들은 어떤 동물일까?”
뜬금없어 보이지만, ‘처음 보는 상황’처럼 느껴지게 하여 의외의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게 돕습니다.






익숙함(관성)과 낯설음(비관성)은 표면적으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모든 것이 이미 경험한 듯한 느낌, 즉 데자뷰(deja vu)를 경험하며 편안함과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익숙한 상황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뷰자데(vuja de)의 순간이 창의적인 통찰을 불러일으킵니다.

늘 해오던 대로 편안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의식적으로 '뷰자데'를 실천하여 고정된 사고틀을 깨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매번 익숙함을 깨려 한다면 과도한 리소스가 소요될 수 있기에, 데자뷰의 안정성과 뷰자데의 혁신 사이에서 유연하게 균형을 맞추는 태도가 핵심입니다.

이는 우리가 효율과 혁신 사이를 오가며 성장할 수 있는 가장 탄탄한 기반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필요한 인사이트는 데자뷰인가요, 뷰자데인가요?



<함께 참고하시면 좋을 영상>

https://youtube.com/shorts/rWWCXnVHgDg?si=k3l5q_4mXs1yZpe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한한 선택지 속에서 나는 더 좁은 선택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