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꼰대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
언젠가부터 '꼰대'라는 말이 들린다. 다행이다. 한국은 기성세대의 표준이 지나칠 정도로 오래, 강하게 유지되었다. 개성 세대, X세대부터 MZ세대까지, 새로운 세대를 부르는 칭호는 항상 있었다.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붙인 이름은 처음이다.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시선이 항상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목소리를 압도해왔다.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던 시절, 유럽 문명의 인류학자들이 비유럽 문화권들을 이해한 틀대로 정체성을 강요했듯이, 한국의 기성세대는 신세대를 압도해왔다.
인간의 유한성은 세대교체의 필연성을 보장해야 한다. 은퇴에 의해서든, 죽음에 의해서든. 그런데 한국에서는 유독 세대교체가 안되고 세월이 흘러도 구조적 변화가 거의 없다. 이건 이상하다. 세월이 지나면 기성세대는 자연스럽게 뒤로 가고, 신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기성세대의 표준이 지속된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압도적인 표준을 수립하고, 유지하고 있는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다. 그 전 세대는 식민지 지배와 내전이라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고, 세대의 표준을 미처 세우지 못하고 퇴장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기성세대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체적인 사회적 표준을 수립하였다. 교육, 노동, 자본, 문화, 언어에 걸친 표준을 압도한 것이다. 폐허에서 시작해서 압축적 성장기를 살아가면서 현대 한국사의 OS를 전부 코딩했다.
그 뒤는 386으로 불렸으나 이제는 586이 된 세대가 이었다. 그 뒤는 X세대, Y세대, MZ 세대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뒤따랐으나, 사실 새로운 세대가 사회에 등장하면 '거참, 요즘 젊은 사람들은...'이라는 말들이 나오다가 사라졌다. 염색을 하고 배꼽티를 입던 젊은이들은 세월이 지나면 단정한 머리에 셔츠를 입고 출근하고,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라고 불리던 새로운 세대는 얌전히 기존 표준에 맞게 깔끔한 보고자료를 인쇄해서 결재를 받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 사회는 엄연히 말하자면, 단 한 번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베이비붐 세대에 세워진 가치관과 기준이 그 후의 모든 세대를 압도한다. 신세대의 반항은 두발, 패션, 언어, 온라인 공간에서 거세게 일어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 세대가 한 사회의 권력을 과점한 시기가 워낙 길었고, 그 세대는 도전 없이 그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인데, 2021년이 되어서야 대거 은퇴가 예정되어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베이비붐 세대는 위로부터도, 아래로부터도, 도전을 받지 않았다.
이제는 586 세대가 압도적이라 하지만, 새로운 표준을 세웠다기보다는 기존 체제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베이비붐 세대가 윈도우즈라면, 586 세대는 Microsoft Office 패키지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적응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세대가 부상하면 기존 세대의 기준에 편입된다. 통상 '정신 차렸다'라고 불리는 과정이다. 새로운 기준과 생각을 들이밀면 압도적인 힘으로 누른다. 순응하게 되면 '사람 되었다'라고 칭찬을 받는다. 계속 반항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한다는 잔인함이 내포되어있다.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세대에게 권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아래아한글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라. 모든 서류가 손으로 작성되던 시절의 표준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컴퓨터인가 뭔가 암튼 그거' 잘하는 젊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의 표준에 맞춰서 '깔끔하고 보기 좋게' 문서를 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기술은 새로운 세대가 사용해서 기성세대의 기준과 기호에 맞추기 위해 사용된다.
이쯤 되면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도대체 왜 유독 한국 사회만 이럴까?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충돌하는 현상은 세계 어디든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한 세대의 표준이 이렇게도 오래 유지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상은 보기 드물다. 한국의 유별난 근현대사 속의 궤적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는 이례적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한국의 기성세대는 엄청난 자가 유지 알고리즘을 개발해서 시스템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바로 기성세대의 표준에 순응하는 개인들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알고리즘이다. 인센티브를 부여받은 개개인들은 기성세대의 표준을 재생산에 앞장선다. 우리는 이 알고리즘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 구타받은 후임이 구타하는 선임으로, 눈물짓는 며느리가 눈물을 짜내는 시어머니로, 울분에 찬 대리가 억압하는 부장으로, 부당함에 항거한 의인이 부패에 찌든 권력자로 변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이 모두 겪는다.
젊은이들이 초심을 잃고 변절하여 중년이 되었다고 비판하기에는, 기성세대의 권한이 너무 강하다. 은퇴를 앞둔 지금도 이렇게 강한데, 10년, 20년 전에는 어땠을까. 기성세대의 표준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는 항상 개인이 온전히 부담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았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는 항상 꼰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신세대로 사회에 합류했다가, 구습과 부당함에 치를 떤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선택의 기로에 선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세대였던 내가 기성세대로 편입되었을 때다. 기존 표준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꾀해볼 것인가? 전자는 편하고 후자는 어렵다. 변화를 이끌만한 위치에 가려면, 반드시 기성세대의 표준에 부합해야 한다. 그 표준에 부합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하고, 새로움을 시도하려다가도 좌절하고 순응한다. 그렇게 꼰대가 다시 태어난다.
꼰대는 업데이트를 안 한 사람도 아니고, 변절한 젊은이도 아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쉬운 선택을 한 사람일 뿐이다. 어려운 길을 일부러 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변화를 이끌기 위해 윗 세대의 인정도 받고, 새로운 흐름에도 스스로 적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정말 진주처럼 나오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기성세대의 부조리를 받았으면서도, 대물림 하지 않고, 젊은이들의 패기와 미숙함을 보고도 그 안에서 긍정적인 흐름을 보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주로 화나있다. 물려받은 부당함에는 순응하고, 새로움도 수용해야 하니까.
꼰대라는 호칭이 들린다는 것은, 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신호다. 화난 목소리라 거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들어보자. 이 사람들의 생존성이 변화의 가능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