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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Nov 14. 2023

첫만남(1)

겨울해는 짧다. 이제 막 다섯 시가 지났는데 세상이 어둡다. 커피를 못 마신다는 내 말에 중개사 K는 믹스커피 대신 율무차를 건넸다. 이윽고 복덕방 바깥에서 녹슨 자전거 멈추는 소리가 귓가를 찌른다.

 문이 열리고 노인이 들어왔다.


 세상은 역병에 물들어 있었지만 따위에 굴하지 않는 듯 마스크는 없었다. 어딘가 몸이 불편한지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의자까지 한참을 걸어오더니, 앉을 생각 없이 호탕하지만 경박한 웃음을 콸콸 내뿜었다.


아핰핰핰핰  


…어어~ 계약할 사람이야? 반가워 반가워.

…아 예 반갑습니다 어르신.

…으! 그래! 내가 대한민국 지방 방송에 스무 군데에 다 나왔고 주례랑 봉사도 많이 다녀서 온갖 신문에 다 실린 사람이야. 그런 사람! 내가! 젊은 날에 지방에 올라와서 정계와 주먹계를 사로잡았잖아! 지금은 몸이 이래 아파서 요 모양이지만 내가 대~단한 사람이었어 아하흐하하핰핰  


남자는 눈을 부릅뜨며 대뜸 자신의 역사를 자랑한다.


 저는 곧 서른을 앞두고 있고, 방송에 단 한차례도 나온 적은 없습니다. 평범하게 대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온 촌놈입니다. 나도 이렇게 자기소개해야 하는 걸까. 


 대답할 말이 없을 때는 눈웃음이 최고다. 그 정도의 반응으론 남자의 성미에 차지 못했는지 반복 재생 기능만 존재하는 카세트테이프처럼 그는 불과 몇십 초 전에 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그리고 또다시 물 흐르듯이 입구멍으로 쏟아냈다. 


… 요즘 젊은 세대는 말이야 결혼을 안 해! 응?  


  노인의 시선이 날 훑어내려 가더니 내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확인했다.


… 자네는 아가씨가 있나 보네?

…네. 있습니다. 

…아 으!.. 어.. 그래.. 그러면 언제 결혼해? 


  이것도 인연인데 자신이 주례를 서겠다.. 자신이 주례를 봤던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잘 산다..

쉽게 해주는 주례가 아닌데, 기꺼이 해주겠다..  


 조그마한 복덕방은 어느새 웅변장이 되었다. 


… 결혼해서 애도 낳고 그래야지! 어! 둘셋넷 낳아야 나라가 부강해지는 거야!.. 결혼하면 애 낳을 거야!? 

…아하하.. 아직 먼 얘기예요. 

… 벌써부터 마음을 그래 먹으면 안 돼~ 글러먹은 거야.  자네같이 마음먹으니까 나라가 이 모양인 거야.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계산적이야..   


중개사 K가 노인의 말을 멈추려 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 계약은 금방 하는 거고 이것도 인연이니까 얘기하는 거야.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 이 말이야. 

어디 가서 이런 얘기해 주는 어른이 있는 줄 알아? 


 훈화, 나라정세, 다시 노인의 역사, 젊은 시절의 강성함을 추억하는 노인의 반복된 말에 지쳐 

중개사 K에게 눈짓으로 끝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중개인 K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생각했는지 노인과 나 사이에 계약서를 펼치고는 노인을 자리에 앉혀놓고 계약을 진행시켰다. 그제야 만남의 목적을 노인은 깨달았는지 임대계약이 시작되었다만, 진행사항 계약서의 사실확인보다는 자신의 방 가격이 그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또는 넓은 아량을 확인받고 싶었는지 다시금 녹슨 성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 요즘 젊은 친구들이 힘드니까... 내가 5만 원! 5만 원 그거 깎아서 받아주는 거야~  할아버지가 파할 십! 먹은 할아버지가 이렇게 인심이 좋아요! 아핰핰핰핰 5만 원이 땅 판다고 나오는 돈은 아니잖아? 고마운 줄 알아야 해~ 젊은 사람들은 고마운 걸 몰라~ 


  나는 계약을 하러 온 것일까. 노인의 침방울을 옷에 묻혀가기 위해 온 걸까. 그의 집에 살기 위해선 그의 아밀라아제를 담아가는 의식을 치러야만 하는지도 몰라. 애꿎은 계약서 글씨만 쳐다보고 있었다.  


… 아니에요. 어르신 너무 감사하죠. 저도 집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 

…어 그래그래. 아하하하하핳 우리 집 좋아~ 자네는 운이 좋은 거야! 집이 금방금방 나가!   

5만 원이 쉽지 않은 금액이야~ 할아버지가! 이 박기택이가! 그래 결정을 하자 그랬어 할아버지가!  

 

 노인의 이름은 박기택이었다. 박 기 택. 계약서를 살펴보니 그는 80에 근접한 나이였다. 그의 드넓은 아량을 인정하자 그제야 만족했는지 미소가 드렁드렁 걸려 있었다. 크랙이 가 훤히 보이던 잿빛의 콘크리트 틈, 한쪽 벽 가득한 유럽 카페거리 벽지, 누렇게 삭아버린 벽지가 생각났다.


… 어르신 혹시 도배를 해도 괜찮을까요. 

…그럼~ 들어오는 사람 마음이지. 근데 도배 깨끗한 거 같던데~ 할 필요 없을 걸. 


 미리 촬영을 했던 안 하는 게 이상한 수준인 벽지상태를 보여주려 하자 그가 거절했다.   


… 됐어 됐어, 자네 돈으로 한다는데 뭐. 

… 들어가세요. 이삿날 뵙겠습니다. 


대꾸도 없이 떠나는 기택이 몸을 실은 자전거가 점차 멀어진다. 중개사 K는 머쓱한 듯 날 바라봤다. 


…힘들죠? 하하하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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