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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꼬마 Feb 21. 2023

결말, 그 안의 이야기

책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오래전, 어린아이들의 젊을을 빼앗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마법사가 나오는 동화를 읽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꼭 그 마법사와 같았다. 그런 종류의 동화가 늘 그렇듯 이야기는 마법사가 벌을 받고 갇혀 있던 아이들이 풀려나며 끝이 났다. 그걸 사람들은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겠지. 그런데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이미 그의 손에 죽어간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사라져버린 아이들의 젊은은,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삶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살아남은 아이> 조진주, 223-224p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의 제목과 이 글의 서두인 '동화 속에서 죽은 아이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잊혀진다는 것.


  범죄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는 잊혀진다. 그 피해자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가해자의 신고과 처벌에 대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사람들은 더이상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그 범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끼리 가해자를 잊는다. 피해자는 잊혀진 채. 사건에 희생자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동화에서 죽은 아이들은 잊혀진다. 살아남은 아이들, 일종의 주인공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누가 기억해주는가. 그 아이들도 살고 싶었을 것이고, 젊은 시절을 살고 싶었을 텐데. 그들은 잊혀졌다.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체이지만, 타인은 그들을 인생의 주체로 판단해주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범죄들이 벌어져왔다. 우리에게는 기사였고, 뉴스였으며, 이야깃거리였지만 피해자들에게는 현실이었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 책을 읽고 문득 그들이 궁금하다. 우리에겐 그저 하나의 소식이었을 그 이야기가 지금 그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범죄는 사람을 바꿔놓는다. 단순히 사건이 해결되었고, 피해자가 살아돌아왔고, 가해자는 처벌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피해자가 사건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두가 가해자의 처벌에 대해 침 튀기며 토론하는 사이에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피해자는 어떤 삶을 살까. 그 이야기를 이 책이 담아놓은 것 같았다.


  주인공 지희는 아주 어렸을 때 유괴를 당했다. 같이 납치당한 동네 동생 미성은 시신으로 돌아왔고, 덕분에 지희는 잊혀졌다. 범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죽은 아이에게 밀려 사건을 풀 열쇠 취급을 당했던, 그리고 죽은 아이의 엄마에게 죄책감으로 시달렸던 지희의 상황은 범인이라고 예측되는 사람이 나타나고 나서도 같았다. 미성에게 밀려 피해자이길 잊혀졌던 지희는 이제 가해자에게 밀려 피해자이길 잊혀졌다. 모두가 가해자의 처벌이 우선이라며 피해자의 상황을 보살펴주지 않았다. '살아남은 아이'는 어디서 보호받는가.


  그런 상황들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평생 겪고 자란 지희와 사건의 목격자였던 그들의 친구 규연 입장에서는 그렇기에 시현의 삶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현은 분명 가정학대를 당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만약 내가 엄마의 학대에 시달려 집을 가출했다고 이야기하는 꾀죄죄한 어린 소녀를 마주했다면 결론적으로 경찰에 신고하고자 했을 것이다. 잘못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하며, 시현과 그녀의 더 어린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저렇게 폭력적인 사람을 아이들과 함께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나만의 정의감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가해자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아이들이 다시금 그 엄마와 지내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분노하며, 이가 시정될 수 있도록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희와 규연은 이에 집중하지 않았다.


신고와 처벌만으로 세계가 단박에 달라지는 것은 아님을 아는 두 사람이기에, 판단의 기준은 이어질 시현의 삶이다.

<살아남은 아이> 조진주, 303p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눠지고 난 후의 피해자 즉, 어린 시현의 삶. 그녀가 '살아남은 아이'로서 살아갈 세상이 가장 중요했다. 그 둘은 이미 너무나도 힘든 '살아남은 아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범죄와도 연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와는 달리 그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그들은 기꺼이 집중해줄 수 있었다.

  다행히 시현은 행복한 삶을 사는 듯 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그녀의 엄마가 그래서 바뀌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이 '살아남은 아이'라는 말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모두가 과거라고 치부하는 일이 계속해서 과거가 아닌 현실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사는 사람들. 안쓰러워하고, 기특하다고 해줄 뿐, 사건과 관련없는 사람들에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냥 한 아이. 이 아이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그 '현재'가 더이상 '과거일 뿐'이라고 비난받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규연아, 우린 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극복하지 못한 과거 같은 거 되게 진부한 이야기인데, 지나간 일들 따위 무시하고 지금만 보며 살면 되는데, 왜 그러지 못할까?"
"과거가 아니라서 그래. 계속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데 그게 어떻게 과거야?"

<살아남은 아이> 조진주, 186-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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