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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r 19. 2024

휴직자에게 3월이란

한낮의 바람이 산들산들 부드럽다.

요가원을 나서는 길,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어 들고 얇은 카디건 차림으로 걸었다. 3월 첫 주까지 운동복 위에 패딩 재킷을 걸치고 다녔는데, 이번 주말 즈음에는 겨울 옷을 정리해도 될 것 같다. 파란 하늘은 쨍하니 구름 한 점 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딱 맞춤 한 바람이 내 목덜미를 싱그럽게 스치자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이십 대 때 잠시 머물렀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와 엘에이. 우리나라에서는 봄과 가을에 단 몇 주 동만 반짝 누릴 수 있는 이런 화창한 날씨가 그곳에서는 일 년 내내 기본값이었다. 이런 하늘을 매일 보고 이런 바람을 매일 맞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질투 나던 날씨였다.



3월의 따한 낮을 누리며 걸었다.

운동이 끝나고 딱히 갈 곳이 없었지만 그냥 동네를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그야말로 휴직자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나를 쫓아오는 사람도 없고 쌓여있는 업무 메시지도 없다. 수업도, 학생도, 공문 처리도, 교재 연구도 없다. 학교에 있었다면 지금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했을 시간이겠다. 식후의 피로감을 이겨내기 위해 커피를 내려 마셨으려나. 나는 작년 말부터 커피를 줄여왔고 현재까지 잘 실천하고 있다. 20년 간 즐겨온 커피를 끊었다는 건 인생의 대단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약 5개월째 커피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출근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카페인의 힘을 반드시 빌려야 할 정도로 고도로 집중하여 처리해 낼 일이 지금 나에게는 없다.



휴직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쉬면서 뭐 할 거야?"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기를 실천할 거야. 쉼이 필요해."라고 답하곤 했다. 돌아보면 지난 휴직 기간들을 나는 필요 이상으로 바쁘게 살았다. 당시는 연년생 자매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라 애들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찰 시기였는데, 나는 새벽 요가를 다니고 필라테스를 배웠고 수영 강습도 받았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고 캘리그래피를 배웠다. 그뿐이었던가. 미라클모닝을 한다며 꼭두새벽에 기상하여 독서록을 작성하고 필사를 하고 강변에 나가서 달리기를 했다. 초보 엄마였던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나를 잃어버리는 듯한 감각이 두려웠던 것 같다. 뭔가 생산적인 걸 하지 않으면 나의 소중한 일부가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애엄마로서의 나만 남고 '진짜 나'는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노력이 지나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게 해 주었고 독서의 끈을 놓지 않게 해 주었으니 유익한 측면이 많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나를 소모시키는 경험이기도 했다. 일례로 자기 계발이라는 미명 아래 내가 하는 활동들을 sns에 꾸준히 기록했는데, 공유네트워크의 특성상 그건 타인들을 끊임없이 지켜 봄과 동시에 나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일이었다. sns를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잔상이 남아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다가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이런 시스템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감각과 자극에 예민한 편이라 sns에 몰두하면 그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는 걸 말이다.



보여주기를 그만두면서 내가 하는 활동들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운동하는 시간이 줄고 읽는 책의 권수도 줄었다. 그만큼 운동을 안 해도 그만큼 독서를 하지 않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 이른바 빼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이러한 빼기의 감각은 의식주 모든 것에 영향을 주어서, 쇼핑을 하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고 먹는 양도 줄었다. (먹는 것에 관해서는 사실 '양'보다 '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음식을 섭취하기, 특히 야식 먹지 않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식탐 넘치는 동거인 때문에 종종 실패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잠이다. 양질의 수면이야말로 심신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걸 나이 들면서 저절로 알게 되었다. 십 대 때는 밤새서 공부했고 이십 대 때는 밤새서 놀았다. 그다음 날 하루 정도 푹 자면 괜찮았으니까. 그건 젊음의 특권이었다. 내일의 성과는 오늘의 잠에 의해 결정되기에 나는 매일밤 8시간의 수면 시간을 확보한다. 밤 10시, 아무리 늦어도 11시 전에는 잠든다. 직장에 다니면서 매일 8시간 잠자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휴직기간만큼이라도 기필코 나의 소중한 잠을 사수한다.



밤 10시에 잠들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금요일밤의 나 혼자 산다, 토요일밤의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외에도 보고 싶은 넷플릭스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것, 때로는 고요한 밤의 독서, 한밤중에 글감이 떠올라 글을 쓰는 일 등등.. 뭔가 흥미로운 것에 몰두하게 되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절대 끊고 싶지 않아 지는 데 그 마음을 다잡고 과감히 전등을 끌 줄 알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젠가 내 친구 K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자는 시간이 제일 아까워. 잠은 죽어서 실컷 잘 텐데.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자느라 그걸 못하다니 억울해." 그는 초단위로 계획을 세운 계획을 실천하는, 내가 아는 가장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다. 무려 교육감의 자리까지 오르리라는 꿈을 가진 다부지고 유능한 교사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진정 존경하고 그가 교육감이 되면 우리 지역의 교육 여건이 나아지리라는 확신하지만, 자꾸만 잠을 줄이는 그가 걱정이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보다 그것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부자가 된다



소노 아야코 작가의 말을 곱씹는 요즘이다.

학교에 있는 동료들에게는 연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3월에는. 새 학기를 통과하는 학교 현장이 얼마나 분주지 알기에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을 품고 혼자 조용히 이 여유와 행복을 만끽한다. 좋아하는 요가를 매일 하고, 봄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고, 혼자 점심을 먹고,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 그러다 졸리면 낮잠을 자고 밤 10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물론 집안일도 하고 육아도 한다. 직장일과 병행할 때보다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무엇보다, 내글을 쓰는 빈도가 늘었다. 쓰고 싶은 것이 생각났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쓰려고 한다. 이게 벌써 3월의 몇 번째 글인지. 휴직자에게 3월은 '발행'이다.




지난 주말에는 가족들과 교외로 소풍을 다녀왔다.

일요일 저녁 늦게 귀가했는데도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나는 출근을 하지 않으니까.

아, 쓰다 보니 아무래도 요즘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것 같다. 더 좋아하고 더 기뻐하며 더 사랑하며

이 유한한 자유를 살뜰히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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