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면 책을 읽고 나면 간단하게라도 기록해두는 것이 좋다.
무슨 내용이든 괜찮다.
줄거리도, 감상도, 문체나 분위기도 좋고,
마음에 남는 문장이나 저자에 대한 느낌도 좋다.
자유롭게 쓰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대부분 잊어버리게 된다.
이건 내가 학생들에게, 또 우리 집 아이들에게 시시때때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정작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서 부끄럽다. 책 읽기는 그냥 책을 집어 들고 펼치면 저절로 되는데, 글쓰기는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매일 다섯 줄의 짧은 일기조차도 삼일씩 미뤄 한꺼번에 쓰기 일쑤다. 하얀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끝없는 막막함을 불러온다. 글쓰기가 주는 이 저항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영화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은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다짐한 뒤에야 글이 써졌다고 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글이 안 써질 때 얼마나 괴로울까. 나는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사람인데도, 잘 쓰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가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작가도 아닌데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그냥 안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보여줄 곳이 없다면, 나는 정제된 글을 쓸 기회도 잃게 된다는 것. (부끄럽지만 브런치에 올리는 글이 내 최대치다.) 쓰고는 싶지만 잘 쓸 자신은 없고, 게으름에 쉽게 지는 나. 나처럼 대외적인 사람에게 남의 시선이란 삶의 동력이자, 동시에 생의 피로이기도 하다.
글쓰기가 이토록 부담스럽고, 내 글이 끝끝내 부끄러운 이유는 모든 글쓰기가 결국 대상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나를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글은 늘 ‘무엇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 점에서 글쓰기는 내 생각과 감정, 판단과 시선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때때로 악성 댓글조차도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보다 그 말을 쓴 사람의 인격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글은 결국, 말하는 사람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쓰지 않으면 마음은 더 답답해진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있는데, 그걸 꺼내지 못한 채 삼켜버릴 때의 무력감은 크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잘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물러서려고 한다. 정제되지 않아도 괜찮고, 어딘가 미완처럼 보여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어쩌면 쓰는 것과 검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건,‘완벽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쓰는 것’을 선택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쉽지 않다. 오늘 쓴 문장을 내일 보면 부끄럽고, 어제 남긴 글이 견딜 수 없이 유치해 보일 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감정까지도 기록의 일부라 여긴다면, 글쓰기는 더 이상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조금은 덜 정돈된 문장, 조금은 흔들리는 문장. 그 속에 지금의 내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글을 쓰다가 길을 잃어버려도 괜찮다. 읽은 책에 대해 간단히라도 써보겠다고 창을 열었지만, 결국 글쓰기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글이 되어버렸다면—그것 또한 나의 진실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