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2

by La Francia


헤르만 헤세 소설의 키워드는 성장이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청소년기부터 성년기에 겪는 내적 성장을 보여주었다면 싯다르타의 성장은 삶의 전반에 걸친 서사이며 보다 영적이다. 그렇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싯다르타>를 종교소설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불교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기틀을 마련하고 있지만 싯다르타가 나아가는 길은 무척 독자적이기 때문이다. (줄거리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야기에는 싯다르타의 친구인 고빈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친구야말로 전형적인 불교구도자의 모습이다.) 헤세는 일생동안 종교를 깊이 탐구했고 인간이 종교를 통해 혹은 그것을 초월해 깨달을 수 있는 것에 관하여 <싯다르타>라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말하고자 했다.


헤세가 펼치는 이야기의 구조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온실 속에서 훌륭한 화초처럼 살던 아이가 바깥세상의 무질서와 혼돈을 경험하며 내면적 진리를 깨닫는 과정이다. 작가는 그 도구로 양극단의 있는 대립적 가치들을 제시한다. 이것이 극명한 인물과 언어로 표현된 작품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다. 이성과 감성, 질서와 혼돈, 명료와 혼돈, 예술과 형식, 사유와 감각, 쾌락과 절제.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아폴론적 가치를 이분법처럼 상징하는 두 인물을 관찰하며 독자는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치우치는 것을 감지한다. 마치 mbti검사를 하는 듯, 나는 어느 쪽에 가깝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헤르만 헤세의 장치이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선과 악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했다. 싯다르타는 몸소 이론(관조적 삶)과 실제(실제적 삶)라는 종교적 양극단을 경험한다.



<싯다르타>에서 이분법을 통해 결국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일성이다. 어느 한쪽만으로 이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도록 유도한다. 흔히 종교적인 수련은 자기 인식에 이르기 위해 세상과의 인연을 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헤세적 관점에서는 수련하는 내면과 마찬가지로 외부세계도 인정하고 물질세계에서도 신을 인식한다.


이 소설에서 형상화된 싯다르타의 모습이 '예수와 부처의 종합'이라든가 이 소설이 '동양의 신비적 구원의 도(道)에 기독교적 색채가 담겨 있다.'든가 하는 지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인도와 중국의 철학 및 정신세계에 평생 몰두한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 선교사이자 저명한 인도학자였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종교와 정신세계를 배웠고 공자와 노자, 장자 등 중국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은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독자적 신앙인 것이다. 싯다르타는 사랑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 세상과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신적인 총체성을 완성하는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싯다르타>가 지니는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면이다.

작품해설 중에서



단일 개체를 인정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바라보기. 싯다르타의 여정을 글로 읽으며 이것이 매우 설득적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일생 무교이지만, 헤르만 교? 헤세 교?라고 부르는 종교가 탄생한다면 나는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있다.) 인간이 느끼는 충동과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포용과 너그러움 마저 엿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었던 부분은 2부의 '아들'챕터이다. 자식을 향한 인간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사랑과 집착을 싯다르타도 경험한다. 아들이 겪을 고통이 미리 짐작되는 바, 뒤따라가서 뭐든 대신해주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는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아들 때문에 겪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느꼈을 마음을 짐작해 보는 마음 또한.




훌륭한 독서 경험을 하였다고 한들 그 즉시 삶의 모습이 바뀌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욕심이 생기기 않을 도리가 없으며, 집착을 하지 말자고 마음먹으면 더 집착하게 될 뿐이다. 상대방을 더 이해해 보자고 다짐하지만 알다시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볼 수 있다. 내가 욕심부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누군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우리는 너그러워질 수 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음으로 인해 상대의 가능성도 믿게 되는 것이다.




지식은 가르칠 수 있으되 지혜(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싯다르타의 말에 머물러본다. 바깥의 길은 내 안으로 통할 것이다. 경험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의 모든 경험은 낱낱한 지혜를 불러올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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