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줄거리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by La Francia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배우는 모든 것을 잘 깨우쳤으며, 고매하고 불타는 의지와 드높은 소명감을 지닌 젊은이였다. 싯다르타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는 모든 이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정작 싯다르타 자신의 내면에서는 불만의 싹이 트고 있었다. 영혼의 불안함과 정신의 갈증이 그를 흔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 채 다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궁극적인 목마름이 그에게는 있었다. 싯다르타는 고행자들 무리에 섞인 사문(탁발승)이 되기로 결심한다.



사문들과 함께 지내며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지만 싯다르타는 결국 자아로 되돌아오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앎'이 존재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 그는 부처 고타마를 찾아간다. 완성자 고타마는 이 세상은 온통 번뇌로 가득 차 있고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되리라 설법하며 팔정도를 가르쳤다. 그보다 더 나은 가르침은 없다고, 싯다르타는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해탈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서 홀로 목표에 도달하고자 싯다르타는 또다시 떠난다.



어느 도시에서 싯다르타는 아름다운 기생 카말라를 만난다. 그녀에게 사랑의 기교를 배운다. 카말라에게 가져다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미의 집에 기거하며 사업을 배운다. 그들은 한결같이 싯다르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싯다르타는 세 가지를 할 수 있다.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당신이 배운 것,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
-저는 사색할 줄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을 압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저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쓸모가 있지요? 예컨대 단식 같은 것 말인데요, 그게 무엇에 좋지요?
-나으리, 그것은 아주 좋습니다. 단식은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예컨대 싯다르타가 단식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당신한테서,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오늘 당장 아무 일자리건 얻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싯다르타는 이렇게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으며, 초조해하지도 않고, 곤궁해하지도 않으며, 설령 굶주림에 오래 시달릴지라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나으리, 단식이란 그런 데 좋은 것입니다.


세속과 나태함이 싯다르타의 영혼을 메우고 금욕과 사색, 분별은 그의 내면에서 작동을 멈추려 했다. 주사위 노름에 빠져들게 되면서 탐욕에까지 사로잡힌 싯다르타는 자신을 증오하는 동시에 막대한 판돈 때문에 걱정하는 불안한 쾌락을 맛보았다. 사십 대에 들어선 싯다르타. 잠을 청해보아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던 밤, 그는 이러한 향락과 무의미한 생활과 자기 자신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원함을 깨닫는다. 그는 그 도시를 떠난다.



지칠 대로 지친 싯다르타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다. 그때 그의 영혼 저너머에서 어떤 소리가 울려온다. 성스러운 옴. 그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행위를 자각한다. 마침내, 자아가 고요해진다. 자기가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토록 확신에 넘쳐서, 이토록, 두려움 없이, 이토록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이제 싯다르타는, 자기가 바라문으로서, 참회자로서 이 자아와 투쟁을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그 싸움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던가 하는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예감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자기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언제나 가장 현명한 자였고, 언제나 최고의 열성파였으며, 언제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한 걸은 앞서 있었으며, 언제나 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언제나 사제 아니면 현인이었다. 이런 사제 기질 속으로,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기의 자아가 살며시 파고들어 와서는 거기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동안, 자기는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쾌락과 권력에, 여자와 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던 사제 의식과 사문 의식이 죽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자기는 계속하여 그 가증스러운 세월을 견뎌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구토증을, 그 공허감을, 황량하고 길을 잃고 타락한 인생의 그 무의미함을 견뎌 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러한 삶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으며, 쓰디쓴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탕아 싯다르타, 탐욕자 싯다르타도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싯다르타는 죽고 없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싯다르타란 덧없는 존재이며, 형상을 지는 것은 모조리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기는, 이 새로운 싯다르타는 젊고 기쁨에 가득 찬 어린아이이다.



싯다르타는 사문생활을 청산하던 날 만났던 뱃사공을 찾아간다. 가진 것 하나 없던 그를 위해 묵묵히 강을 건너주었던 그의 이름은 바주데바. 싯다르타는 그의 집에 머물며 나룻배 다루는 법을 배우면서 바주데바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로부터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번뇌의 근원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순간이었다. 싯다르타는 강으로부터 경청하는 법도 배웠다. 흐르는 강물처럼 쉴 새 없이 배웠다.



그러던 중, 부처 고타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순례를 떠난 카말라는 우연히 싯다르타와 재회한다. 그녀는 한 남자아이와 함께였는데, 그 소년은 다름 아닌 싯다르타의 아들이었다. 카말라가 뱀에게 물려 죽게 되고, 싯다르타는 아들과 함께 뱃사공의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소년은 계속 어두운 표정을 하고 불손한 행동을 한다. 급기야 밥그릇을 아버지에게 던져 깨뜨려버린 아들. 그동안 말이 없던 바주데바가 싯다르타에게 아들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것을 제안한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수많은 걱정과 염려 때문에 친구의 충고를 따르지 못한다. 아들로 인해 괴로워하며 싯다르타는 비로소 자신이 사문이 되어 떠나겠다고 했을 때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앎보다도 자기의 자식에 대한 정이, 자식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자기의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하였던 것이다. 도대체 자기가 여태까지 어떤 일에 이토로 마음을 온통 빼앗겨 본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자기가 여태까지 이토록 맹목적으로,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며, 이토록 아무 결실도 없이, 그렇지만 이토록 행복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사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어떤 다른 사람에게 홀딱 빠져서 자신을 몽땅 바칠 수가 없었으며, 자신을 망각할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그는 그런 일을 결코 할 수가 없었으며,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자기와 어린애 같은 인간들을 구분해 주는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아들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싯다르타도 완전히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한 인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어떤 사랑에 빠져 버리고, 어떤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어 버리는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도 인생에서 한 번, 늘그막에 와서야 비로소 가장 강렬하고 가장 진기한 이러한 열정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열정 때문에 비참할 정도로 괴로운 슬픔을 맛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행복에 젖어 있었고 예전과는 약간 다른 새로운 인간이 되어 있었으며, 마음이 약간 더 부유해진 상태였다.



인간의 허영심, 탐욕, 충동, 욕망을 싯다르타는 더 이상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았다. 예전보다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많은 관심을 지닌 눈길로 사람들을 보았다.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가지며, 모든 사물 또한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다는 것을,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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