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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작가 Jan 16. 2021

퇴근길 지하철은 내 일기장

다니던 회사의 상급 기관으로 파견 발령이 난 후 3개월 정도가 지났다. 통근시간은 집에 나와서 사무실 내 자리까지 1시간 15분 정도가 걸린다. 그중 걷는 시간이 25분이고 지하철 타는 시간이 환승을 포함해서 50분이다.  좀 걸어볼까 해서 한 정거장을 걸어가다 보니 그렇지 않을 때보다 10분 정도가 더 걸리다. 


다행인 것은 회사가 지하철 종점에 있어서 출근길에는 앉지 못하지만 퇴근길에는 항상 앉을 수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뜨뜻한 지하철 의자에 앉으면 하루의 피로가 몰려와 잠이 솔솔 왔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유튜브의 알고리즘 속을 헤매기도 하고 넷플릭스의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글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지만 맑은 정신, 몰입할 수 있는 장소, 안정적인 시간이 없었다. 파견 나온 하급 기관의 직원인 나는 이전보다 야근해야 하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 가면 쓰러져 자기 일수이고, 스트레스에 맥주 4캔 만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하루가 내 손을 뿌리치고 저 멀리 뛰어가는 데 난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퇴근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앉아서 갈 수 있는 지하철 30분',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 적당한 소음이 주는 몰입감, 매일 반복되고 회사에서의 그날의 기억이 가장 생생한 이 시간을 심폐 소생시킬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지하철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옆 사람이 쳐다보면 어쩌지?'라는 마음에 노트북을 손으로 가리고 싶었다. 다리가 짧아서인지 노트북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려가려고 해서 손으로 눌러 노트북을 고정하고 타이핑을 했다. 타이핑 소리가 나자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에이 몰라, 보면 어때'


시간이 지나자 점점 뻔뻔해졌다. 이제는 노트북 거치대를 사서 노트북의 각도를 올리고 손으로 누르지 않아도 되도록 작업환경을 개선했다. 


퇴근길 20분 정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지하철 역까지 걷는다.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자연스럽게 거치대와 노트북을 꺼내 무릎 위 가방에 올려놓고  그동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글감 단어를 보면서 하나를 골라 마음 가는 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 벌써 한 주제를 끝내고 두 번째 주제를 쓰고 있다. 


내가 앉아갈 수 있는 시간은 딱 30분이었다. '30분 후 제출'이라는 마감시간 때문인지 몰입감이 대단했다. 30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제야 저 멀리 뛰쳐나간 하루의 발목을 잡아 내 옆자리에 앉혀놓을 수 있었다. 오늘 급히 스쳐 지나간 생각들, 모호했던 감정들을 붙잡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와 내 주변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내 생각과 입장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하루와 이야기를 나누고 보내주고 나니 난 어느새 집 앞에 와 있었다. 


문을 열고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렇게 직장인의 하루가 끝나고 나는 또 다른 직장인 가정의 문을 열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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