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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작가 Jan 16. 2021

민원이 접수되었습니다.

오늘은 두께가 손가락만한 민원서가 3개나 왔다. 진행 중인 소송도 1건, 법률 자문 중인 민원도 1건 있다. 대부분 10일 내에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다.

 

상급기관에 오니 우리 회사에서 발생한 문제들 중 해결이 어려운 것들이 결국 여기로 오는 것을 알았다. 회사에 있을 때보다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어렵지만 답변의 무게감은 차원이 다르다.  법을 배우지 않아서인지 법적마인드가 부족해 검토하는데 시간이 더 든다.  


점점 쌓여가는 서류에 답답하고 힘이 빠지고 짜증이 나려고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은 여느 다른 날과 다른 '평소'라고 되뇐다. 마치 군인의 직장이 전쟁터인 것처럼, 이런 전쟁 같은 상황이 바로 내 직업의 평소라고 생각해본다. 


내가 처리하는 일은 대부분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한쪽 편을 들면 다른 편에서 들고일어난다.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본다. 그 둘은 죽기 살기로 자기 이득을 더 챙기려 끝없이 싸운다. 그래서 결정을 하기 위한 명분과 원칙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으며 그것을 관철시켜 적용하는데도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 관철시킨 후에는 예상하지 못한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그전에 회사에서 있던 부서에도 민원이 많았다. 업체를 뽑으면 떨어진 업체가 민원을 내고 일 년 내내 우리 부서가 하는 일에 트집을 잡는다. 거기를 떠나며 홀가분한 기분이었는데, 여기에 와보니 웬걸 이전 부서가 오히려 평화로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래 없어야 정상인데, 뭔가 잘못해서 발생한 업무가 아니라 이 자체가 나의 일이고 그렇기에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 상황을 주어진 환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내 업무 시스템의 현황판에 '민원' 항목에 숫자가 뜨면 생겼던 두려움, 짜증, 부담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반대로 숫자가 뜨지 않으면 '왜 없지'라며 불안해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 것과 그러지 않은 마음이 드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책에서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나쁜 상황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게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에 외부 환경, 스트레스에 대항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휩쓸린다는 것이다. 난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선택할 것인가? 

  

그래도 난 상급기관에 있어서 우리 회사에게 자료를 요청할 수도 있고, 초안 작성을 지시할 수도 있다. 대부분 우리 회사와 관련된 일이기에 완전히 백지에서 시작하는 일은 없다. 


밀려오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차근차근 논리를 세우고 우리 입장을 검토하면 된다. 소송이 들어오면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진 상급기관의 지원을 받으면 된다. 지더라도 내가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간 없었던 나의 업무 경험을 쌓게 해주는 측면도 있다. 지금 하는 일이 평소 경험이 없었던 분야이기도 하고 특히 이 분야의 법적 검토 경험은 내가 부족했던 법적 마인드를 보완하는 기회도 된다. 


민원을 내는 사람은 약자의 입장이고 우리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다. 그렇게 보면 그들이 더욱 답답하고 불안하고 한편으로 억울함 더 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처한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 민원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야근이 늘어날 수도 있지만 직장에서 잘릴위험이 있거나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일 처리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험을 소중히 생각하고 두렵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훈련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옆을 둘러보니 나와 같이 퇴근하는 사람이 지하철에 가득 찼다. 퇴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들도 나처럼 오늘 하루를 잘 견뎌내고 돌아가는 거겠지'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오늘도 난 전쟁터에서 퇴근하고 평화로운 내 집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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