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작가 Feb 26. 2022

다시 피아노를 연습합니다

캐논 변주곡에서 베토벤 월광 3악장까지를 꿈꾸며


내가 피아노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다. 체르니 30번 곡까지 어디선가 들어본 걸 보니 거기까진 배웠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얇은 막대기를 들고 손목이 들릴 때마다 톡톡 내리쳤던 기억, 연습 횟수를 거짓말로 늘려 표시했던 기억, 연습 도중 화장실 간다고 도망갔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에 흥미도 없는 반복 연습이 무척이나 지루했었나 보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만나게 된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앨범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피아노 앞에 나를 다시 앉게 만들었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눈 위에 나무 한 그루'
'Dcember'의 쓸쓸하고 당장 눈물 날 것 같은 선율에 난 푹 빠졌다.


December의 '캐논 변주곡'을 시작으로 Autumn, Winter into spring 등 다른 앨범의 악보까지 찾아 연습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잘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테이프에서 들리던 음악이 내 손끝을 통해 흐르자 감정의 소용돌이가 밀려왔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게 된 쇼팽은 나를 신세계에 빠져들게 했다.
왈츠, 녹턴, 발라드, 마주르카, 에튀드, 스케르쵸, 어떻게 이 모든 곡들이 좋을 수 있을까?


감탄만 나왔다. 서점에 달려가 악보집을 샀다. 그나마 흉내가 가능한 곡들을 연습해봤다. 특히 왈츠 7번이 너무 좋아서 학교 실기시험 곡으로 연습했는데, 아쉽게도 시험에서 연주는 후회가 가득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 만난 베토벤은 쇼팽의 감미롭고 시적인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북받치면서 끓어오르는 느낌이 났다.


특히 월광 3악장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폭주 기관차를 타고 하늘을 향해 내달리는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페달을 밟고 소리를 죽여가며 연습을 했다. 주말에도 연습을 시작하면 3~4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제대로 된 레슨을 받지 않아 흉내 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피아노 치는 것이  즐겁고 좋았다.


하지만 대학교 이후로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이어갈 수 없었다.
피아노는 이런저런 핑계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내 삶에서 그렇게 지워졌다.


시간이 한참 흘러 아이들이 크고 나를 위한 시간을 다시 가질 수 있게 되면서, 다시 피아노가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참 헤매다 보니 어느새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의 메인 테마가 손에서 흘러나왔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내 손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악보집들을 꺼내서 한참을 뒤적거리며 쳐보았다. 어린 시절 즐거웠던 감정이 새록새록 기억 났다.


그토록 완성하고 싶었던 베토벤 월광 3악장을 펼쳤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 차근차근 제대로 연습해보고 싶다. 한 달에 한곡씩 익혀서 내 '재생목록'을 만들고 싶다. 나의 감정과 기분에 맞는 곡을 자유롭게 연주하며 감상에 빠져들고 싶다.


먹고사는데 쓸모가 없다고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피아노가 알고 보니 이제까지 내 옆을 떠나지 않은 몇 안 되는 '소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밀어내지 않겠다고, 매일 옆에 두고 함께하겠다고 다짐해본다.


캐논변주곡 연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