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린 게 물건이지만, 안 그런 척 아쉬워해 보기
1. 집에서 편하게 입는 바지 엉덩이 부분에 손톱만 한 구멍이 생겼다.
2. 안감이 따로 있는 바지라서 다행히 엉덩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3. 그 사실에 안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바지를 즉각 버리는 대신 여전히 입고 있다.
4. 사실 특별히 좋아하는 바지도 아니다.
5. 심지어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남편이 사이즈를 잘못 주문하는 바람에 작아서 못 입는 걸 반품하기 귀찮다고 나에게 준 것이다.
6. 무릎도 튀어나오고 낡아서 옷감도 얇아져 흐물거리고 있으니, 고작 구멍 때문에 버리긴 아깝다, 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7. 이런 게 후줄근한 건가? 싶기도 한데, 정작 이런 엉망진창인 바지를 입고 있는 내 기분이 그다지 후줄근하지 않다.
8. 모르는 척 좀 더 입을까 싶은 생각을 잠시 하다가 아무래도 이제 그만 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마치 '제발 이제 그만 나를 놔줘...'라고 바지가 외치는 듯했기 때문이다.
9. 이 바지와 비슷한 물건은 세상에 널리고 널려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지만, 내 물건이 된 이상 아주 조금은 애정을 줘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10. 내가 잘 보살피고, 관리하고, 버리는 걸 아쉬워할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