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로그] 점점 더 살던 대로 살아지는 인생에 대해
마흔에 마주한 인생의 질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신나게 흔들리고 방황하는 중년의 일상을 나누는 뉴스레터 <마흔로그>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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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고 해서 자동으로 경험의 폭과 깊이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경험해 본 범위 안에서 대충 살아지는 시점이 오는 것 같아요. 해보지 않은 일이 여전히 훨씬 많지만, 해본 대로만 해도 어찌어찌 돈 벌고 사람들과 관계 맺고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숨 쉬고 밥 먹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삶이 맘에 드는가'와 '이렇게도 살아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예요.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일까, 다른 길은 없을까라는 고민은 늘 있었지만, 삶은 살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살던 대로 살아지는 것이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것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얼추 살아지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굳이 불확실한 길을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살던 대로 살지 않는 방법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성실해 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잘도 갑니다.
그러다 마흔을 계기로 나름의 큰 결심을 했어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계속 살던 대로 살게 될 것 같았거든요.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한 번은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많은 고민 끝에 커리어를 바꾸고, 장기 여행을 가고, 갭이어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이 변화들이 저도 정확히 모르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꿈에 그리던 삶을 찾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상상 속에선 분명 그럴듯한 삶이었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덜어내고 나면 그 공백을 하고 싶은 일들로 즉시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쉬는 동안 네가 원하는 답을 찾았니?’라고 누가 물어보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태산입니다. 제 머릿속에 ‘방황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선택의 의미를 저 스스로 찾으면 되지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네, 알아요. 근데 안다고 그게 다 되면… 뭐…
‘Unlearn’, ‘Unbusy’라는 단어들을 첫 레터에서 언급했었죠. 새로운 방식으로 천천히 살겠다고 하면 될 걸 굳이 부정의 접두어를 붙여가며 배운 것을 잊고(‘Un’ learn), 바쁘지 않게(‘Un’busy)라고 말하는 이유는, 살던 대로의 태도를 벗어버리기 전에는 살고 싶은 삶을 꾸릴 수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끊임없이 외부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스킬을 배우고 바쁘게 하루를 가득 채우는 것이 제가 아는 유일한 성공방식인데 앞으로 제가 살고 싶은 삶은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거든요. 제가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하는 것은 이를 테면 이런 것이에요.
모든 일에 효율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 인생의 어느 시점을 지나면 더 이상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생각,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들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강박, 시간은 아주 소중하기에 그걸 잘 사용하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이지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과정’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착각…
인생의 각 행로에서 무엇을 얼만큼 원하고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사회적 기준을 제 안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잠시 속도를 늦추고 보니 안달이 나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제 머릿속 소리들이 들립니다. 그 소리를 다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되길 바라요.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시간낭비’입니다. 방황은 젊을 때나 하는 거지, 마흔이면 정신차려야 하지 않느냐고요? 우리 사회에서 방황이 허락된 젊음이 과연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저는 어릴 때 양껏 방황해 보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해볼 거예요.
안 해본 것은 잘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게 어떨지 다 알면 그게 해본 거지 안 해본 것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