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겪어본 적 없기에
도내에서 확진자가 발생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뤄진 조치는 '문을 닫는' 일이었다.
지역은 축제로 먹고 사는데 그 중요한 축제의 운영을 종료했고, 얼마 없지만 그나마 소규모로 간헐적 운영되던 문화예술행사들도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하루만 문닫아도 피해가 크다고 하는 카지노 전문업체도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어디에나 똑같은 모습이었다. 폐쇄, 폐쇄, 폐쇄…
중국 등 외국에서 입국한 유학생들은 학교 차원에서 2주동안 격리시키면서 그들이 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았고 대학교는 도서관과 체육관 등의 편의시설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이 호흡기질병이 어떤 방식으로 전염되는 지 알 수 없는 시민들은 불안한 마음에 저마다 마스크를 구입하려고 약국으로, 마트로 달려갔는데 이미 가는 곳마다 동이났다. 당시 취재했던 내용에 따르면 마스크 판매가 이뤄진 한 마트에서는 2백장이 5분도 안 돼 품절됐다. 이처럼 공평하게 돌아가지 못하는 기회 속에 누군가는 그래도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이른바 취약계층이었다.
노인들은 일자리사업이 잠정 폐쇄돼 당장 소일거리와 수입을 잃었고 무료급식 봉사도 도시락으로 대체돼 매일같이 경로당으로, 급식센터로 출근하다시피 한 그들은 졸지에 갈 곳을 잃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문을 닫으면서 자녀를 맡기고 일자리에 나가던 맞벌이 부부들은 패닉에 빠졌다. 급기야 일을 그만둬야 하는 근본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감염된 이들을 치료하는 종합병원은 음압병실이 꽉 차서 비상에 걸렸다.
당시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기자들에게 덴탈마스크를 지급했다. 매일 한 명 당 한 개 씩 정도로 나눠주고 필요하면 더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심한 감기가 아니고서야 마스크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릿지(기자가 화면에 출연해 현장 상황을 알리는 일)를 잡을 때에도 턱에 마스크를 걸고(이른바 턱스크) 했다.
취재원을 만나서도 마찬가지로 턱에 마스크를 걸고 얘기한다거나 취재차량으로 이동할 때에도 마스크 착용을 반드시 하지는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방역수칙에 한참 어긋난 행동이었다.
또 그 때까지만 해도 마스크 대란이 잘 실감나지는 않았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회사에서도 슬슬 '마스크를 아껴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는 심지어 마스크를 '선물'로 주고받는 모습까지 생겨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