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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낭만 Jun 14. 2023

순정만화와 다정다감한 이해




언젠가-. 네가 나를 이해하리라 믿어. 그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는 거야 - 박은아, <다정다감>


수려한 그림체와 가슴을 두드리는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순정만화에 빠져 살았던 전적을 하나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리고도 거칠었던 십 대 시절의 나는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탈피하고자 만화책의 수많은 페이지를 넘겼다. 한국 만화부터 일본 만화까지 전부 섭렵하며,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얼굴과 이야기와 감정을 품고 일부러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어냈다.


내가 살던 아파트 상가에는 작은 만화책방이 있었다. 단돈 몇 백 원이면 한 권을 빌릴 수 있었는데, 당시 용돈이 한정적이었던 나에게 그 돈은 약간의 거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걸 보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스스로와 약속했다. 딱 두 권만 빌리기로. 당시 만화책을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는지 계산하지 못했던지라, 나는 옆에서 열 권이 넘는 만화책을 빌리는 언니, 오빠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다정다감>을 만난 건 중학교 입학 이후였다. 이미 완결이 된 만화책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결말은 미리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익명의 누군가가 이 작품의 결말이 아련하다고 적어놓았던 글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때 ‘아련하다’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파란색 바탕, 해바라기의 향을 맡고 있는 두 소녀의 모습이 담긴 표지를 한참이나 바라본 뒤, 한 권씩 해치웠다. 아마 내가 순정만화를 지독하게 좋아한 데에는 <다정다감>의 힘이 막중할 것이다.


내가 만화책에 빠진 걸 알고 난 뒤, 어느 날 엄마는 읽고 싶은 만화책을 모두 빌려 오라고 했다. 같이 읽자는 뜻이었다. 선뜻 엄마가 먼저 제안을 해오자, 나와 언니는 순식간에 만화방으로 달렸다. <다정다감> 전권은 물론이고, <에이치투오>, <파르페틱>, <한낮의 유성> 등 좋아하던 만화책을 몽땅 빌려왔다. 품 안에 가득 찬 만화책을 안고 우리는 엄마의 공간이었던 주방으로 모였다. 그 주방의 식탁에 만화책을 탑처럼 쌓았고 나와 언니, 그리고 엄마는 나란히 앉아 순정만화의 세계로 향했다. 가끔씩 들려오는 엄마의 혼잣말, 언니의 감탄사,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고 다른 소리들은 매우 고요했다.


나와 언니는 감수성 풍부한 중학생, 엄마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어른이라 만화책을 읽을 때마다 나오는 말의 결이 확연히 달랐다. 우리는 신새륜과 강한결 중에 누가 가장 잘생겼는지, 내가 이지였다면 누굴 선택했을지 따졌지만, 엄마는 달랐다. 신새륜처럼 성질이 나쁘면 나중에 결혼해서 고생한다, 문도경이 시원시원하니 성격이 좋아서 저런 친구가 옆에 있어야 한다 등. 다른 이야기지만, 엄마는 영화 <늑대아이>를 볼 때도 죽은 남편이 안타깝다는 말보다, 운전면허증 대신 땅문서를 남기고 갔어야 한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니... 말 다 했다. 아무튼 엄마의 이런 점 때문에 순정만화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되어서 흥미로웠고, 엄마의 농담에 크게 웃기도 했으니 된 거 아닌가.


빌린 만화책을 모조리 다 읽은 뒤, 엄마는 자신도 한때 순정만화를 매우 좋아해서 밤새어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엄마는 <여학생>, <아카시아> 등 고전 순정만화를 전부 섭렵했고, <들장미 소녀 캔디>를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우리를 임신했을 때, KBS에서 방영한 <신데렐라>를 본방사수했다고. 그 여파가 우리에게도 닿은 것인지, 만화책 탑을 쌓은 뒤부터 엄마와 만화에 대해서 셋만의 소소한 장면을 추억으로 꽃 피웠다. 예컨대 <들장미 소녀 캔디>에 등장하는 ‘테리우스’와 ‘안소니’를 두고 두 가지 남자 스타일에 대해 토론한다던가(아빠는 테리우스 스타일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했다), <신데렐라>의 계모 성대모사를 한다던가, 나랑 언니는 <다정다감> 속 대사를 읊으며 뒤로 넘어갈 듯 탄성을 지른다던가. 우리는 순정만화로 실뜨기를 해서 굳이 웃음이 삐져나오는 순간을 만들었다.


신나게 과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중요한 설명을 빼먹었다. <다정다감>은 평범한 여학생과 잘생기고 뛰어난 남학생의 진부한 러브스토리를 큰 줄기로 가진다. 하지만 순정만화의 클리셰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단짝친구와의 우정,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에게서 느끼는 애매한 마음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주인공 ‘배이지’는 오빠만 셋인 집안의 막내딸로 자라지만, 선천적으로 남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쓰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다. 그녀의 친구 ‘문도경’은 화려하게 예쁜 얼굴, 당당한 성격을 가졌는데, 단짝친구인 이지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한다. 이들이 속한 1학년 7반에는 ‘강한결’과 ‘신새륜’이라는 미소년도 있었는데, 강한결은 이지의 첫사랑 남자아이다. 조용한 성격으로 신새륜과 붙어 다니곤 한다. 신새륜은 거칠고 포악한 성격을 지녔지만 잘생기고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이지는 한결과 새륜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이상형이자 첫사랑인 한결을 좋아하고, 사귀는 사이까지 발전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슬플 때 지켜주고, 은근히 다정한 새륜에게 끌리고 만다. 십 대 시절은 사소한 것도 폭풍처럼 느껴지는 예민한 나이다.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은 이지의 처지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새롭게 마주한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과 대면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단짝인 도경을 향한 동경, 첫사랑 한결에게 열렸다가 닫힌 연애감정, 결코 끝나지 않을 새륜과의 사랑. 아마 십 대의 이지가 가장 고민했던 건 ‘어떻게 하면 솔직하게 본심을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이지는 남의 시선을 과하게 신경 쓴 나머지,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기 바쁜 성격이니 말이다. 어릴 적에는 그런 이지에게 공감표를 던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답답해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을 배려하다가, 소중했던 연인을 떠나보내고 말았으니 그 성격을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사람이 타인에게 스며들고 영향을 받는 건, 기쁘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특히 십 대 시절에는 그 영향력을 감히 무시할 수 없다. 각자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같은 반이 되고, 하루에 다섯 번 이상 얼굴을 보고, 심지어 동네도 비슷해서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환경. 처음으로 생긴 꿈에 한 발짝 다가서려고 하지만, 그 선택마저 타인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억울함, 솔직한 듯 솔직하지 못한 말과 툭툭 던지는 말투 때문에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확인하는 마음, 미성년과 성년의 중간이라는 애매함, 어물쩍 넘어갔던 사건들이 큰 파장을 일으켜서 느낀 괴로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뒤, 후회하지만 사과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다정다감>에서는 타인과 맺은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이 곳곳에 배어있다. 나는 작품 속의 감정들에 어떤 경계심도 없이, 온전히 다 받아먹었다.


주인공이라서 당연하겠지만, 이지가 느낀 감정은 전부 그녀의 독백에서 가득 차 있다. 자주 기가 죽는 모습, 남을 도와주려고 나서는 모습, 좋아하는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모습. 그런 이지를 보고 어리석거나 답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그러나 이지의 독백은 가끔씩 알아채기 어려운 마음 상태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런 이지를, 이제는 마냥 답답한 아이로 단정할 수는 없게 된 거겠지.


십 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만 가슴 아파했지만, 지금은 과거를 회상하는 이지의 모습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1학년 7반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하는 얼굴, 폐허가 된 신새륜의 집을 굳이 찾아가서 낮잠을 자는 모습,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굳은 맹세. 이지는 여전히 과거를 사랑하고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몰라볼 정도로 변해달라는 신새륜의 요구를 말끔히 저버린다. 과거를 인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앞으로 이지는 그런 사람으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나를 이해하리라 믿어.” 그 ‘언젠가’가 와버렸다. 이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고맙다. <다정다감> 덕에 만날 수 있었던, 지금은 흐려진 과거로 남은 경험들, 그래도 추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장면이 생겨서 다행이다. 아직도 언니와, 엄마와 <다정다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가끔 농담처럼 강한결이 너무 멋지다며 입을 틀어막고, 엄마 사윗감이라고 들이대면, 만화책 내용을 아는 엄마가 고개를 젓는 게 참 좋다. 신새륜과 강한결로 나눠서 누가 더 낫다는 시시콜콜한 논쟁을 아직도 언니와 할 수 있어서 안심된다.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머뭇거렸던 이지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몇 자 적고, 부모님 집에서 날 기다리는 <다정다감>을 다시 만날 날을 정해야겠다.







이제 너를 이해해. 네가 준 추억은 마음 한 구석에 빼곡히 쌓여있어. 처음 만난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보자, 반짝이는 순간을 간직할 줄 아는 이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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