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상심리사입니다.
이것은 나의 모든 글에 대한 프롤로그이다.
스스로 심리학자라고 소개하기엔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학자’라고 하면 어떤 학문에 능통하거나 그 학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나는 아직도 대학원생이고, 이론가보다는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가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보다는 임상심리사 또는 임상심리전문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지만, 심리학자로 나를 소개하는 이유는 내가 소지한 자격증의 이름보다 글자 수도 적고, 어감도 좋고, 직관적으로 더 와닿기 때문이다.
의사, 변호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병리사, 교사, 물리치료사.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취득할 수 있는 자격들이다. 심리학과를 졸업하면 심리사를 취득하지 못한다. 심리학과에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심리학과 관련된 자격증을 더 많이 갖고 있다.
나는 임상심리사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과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학부에서 심리학과를 전공했고, 이후 석사를 거쳐 현재 박사 과정까지 임상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내 직업을 소개하고 나서 반드시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야 한다. 위에 나열한 직업들과는 다르게 내 직업은 직관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게도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심리학과를 나오면 심리사를 취득할 수 없다. 심리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석사 과정에 진학한다. 취업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지만, 심리학과만 나와서는 OO심리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는 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OO은 심리학의 세부 전공들이다. 심리학에는 아주 많은 세부 전공이 있다. 대중들에게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는 상담심리와 임상심리를 필두로 산업 및 조직심리, 사회심리, 발달심리, 생리심리, 인지심리, 지각심리, 학습심리, 계량심리 등 아주 많은 분과들이 존재한다. 4년 동안 심리학과 학부생들은 각 세부 전공에 대해 가볍게, 하지만 두루두루 익힌 다음 자신의 취향껏 진로를 결정한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해야 비로소 세부 전공의 전문가가 되는 길을 걸을 수 있다.
내가 전공한 임상심리학의 경우, 정말 이상하게도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 5개나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발급하는 정신건강임상심리사 1급과 2급, 한국임상심리학회에서 발급하는 임상심리전문가, 그리고 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하는 임상심리사 1급과 2급이다. (하지만 산업인력공단에서 발급하는 자격은 대부분 인정받지 못한다. 체계적인 수련 과정을 거치지 않을뿐더러 충분한 이론적 지식과 임상경험이 없기 때문에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이 자격증으로 활동하는 분들에게 비난을 받을지라도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다.)
그리고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과 임상심리전문가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석사 학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대학원을 졸업한다고 해서 이 자격증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위는 필수요건일 뿐이고, 졸업 이후 병원이나 센터에서 3000시간이라는 수련 시간을 충족해야 한다. 1년에 1000시간이니까 최소 3년은 수련 생활을 해야 한다.
학부(4년) + 석사(2년) + 수련(3년) = 총 9년
이것은 대학원과 수련기관에 지원해서 한 번에 합격했다는 가정이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재수를 하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심리평가와 심리치료이다. 하지만 몸 담고 있는 곳에 따라서 평가를 많이 하기도 하고, 치료(상담)을 많이 하기도 하고, 연구를 주로 하기도 하고, 행정만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최소한 줄여서 부연 설명을 끝냈다. 여느 직업들도 전문가라고 불릴 수 있을 때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겠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직업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들이는 품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지는 직업이다.
그러니 심리학자로 소개하는 것을 시적 허용으로. 나를 좀 더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어긋난 표현 정도로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