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기가 막히게 좋아
나의 엄마, 아빠는 단 한 순간도 내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사과하고, 이유를 설명하고, 서로 다투고, 마침내 또 다른 안녕을 기원할 때까지도.
당연한 듯 서로 한 집에 살았지만, 부자연스럽지도 않게 서로 다른 집에 짐을 풀었다. 우리 모녀는 우선 할머니집으로 향했다. 세상을 잔뜩 경험한 엄마와 할머니, 그런 두 모녀는 경험한 세상 만큼이나 잔뜩 상처 나고야 말았다. 둘은 지쳤고, 어른의 싸움을 한껏 바라 볼 수밖에 없었던 나와 내 동생 역시 지칠 대로 지쳤다. 할머니를 통해 엄마로서의 냉정이 당신의 딸, 당신의 손녀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지도 실감했다. 나의 엄마가 우리에게는 이 냉정을 경험하게 하지 않으려고 지치는 와중에도 우리에게 다정하려 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만큼은 언제든 기댈 수 있게 해 주고 싶은 그 마음 하나로 나의 엄마는 당신의 마음이 다치는 와중에도 우리를 챙겼다.
할머니는 상처 받은 자신의 딸을 품어 주지 못했고, 점점 지쳐 가는 우리에게 이해해 달라고 더는 얘기할 수 없었던 엄마는 다른 집을 찾았다.
모두 안쓰러운 귀한 사람들이다. 할머니가 밉지 않다. 그저 할머니를 향한 내 마음이 굴곡 하나 없이 차분할 뿐이다. 그저 건강하시길.
아쉽게도 많은 일이 휘몰아친 이 순간은 내게 개강한 지 2주차 되는 시점이었다. 엄마가 내게 말했다. 예정아, 휴학하자. 지금 당장 이 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나였고, 지금 당장 엄마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 했다. 나는 내 의지를 잊은 채 학기 중에 휴학했다. 속상이 넘실거렸다. 나의 막학기가 이렇게 미뤄진다. 내가 해 둔 계획이 미뤄진다. 왜 나한테, 왜 나는 등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생각에 멈춰 있기에는 나는 아직 젊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 이 순간 내가 한 선택이 모두 최선이고 옳다는 것을 되내이고 믿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집이 도통 잘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당장 구하려는 집은 오래 살 집이 아닌 단 몇 개월 정도만 거주할 집이었기에 위치와 보안만을 우선으로 고려했다.
사이트, 부동산 등을 통해 여러 번 살폈으나 집은 너무나 한정적이었고, 딱 하나의 집만 직접 보러 걸음을 옮겼다. 발코니가 있는 꼭대기 층 원룸 오피스텔. 처음 보러 갔을 때에는 너무나 좁게만 느껴졌고, 쓸데없이 넓은 발코니에 괜히 신경질이 났다.
선택지가 없었기에 엄마는 계약을 했고 이삿짐과 입주 청소를 빠르게 예약했다. 입주 청소는 매우 별로여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다행히 이사는 웃돈을 더 드리며 감사를 표했다. 다음 이사도 꼭 약속했다.
이사 전 새로운 집에 몇 번 더 방문했는데, 내 눈이 이상해진 걸까. 집이 그다지 좁아 보이지 않고, 발코니에서는 삼겹살까지 구워 먹기로 약속했다. 사람은 적응의 시야를 가져서인 걸까. 이 작은 공간이 내게 주는 느낌이 꽤 괜찮았다.
발코니 덕에 풍경까지 기가 막혔다. 밤이 되면 이 공간은 더 빛을 발한다. 좁디 좁은 이 공간이 말이다.
짐을 모두 집 안에 옮겼을 때에는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집이 짐에 파묻혔다. 발코니가 없었으면 큰일일 뻔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자리한 짐. 조금씩이든 많이든 어찌되었든 제 자리를 찾아갈 짐이었고, 우리 세 모녀도 이제는 마음 편할 일만 남은 게 틀림없다.
우리 셋이 안쓰러웠던 걸까. 관리사무소 직원 분들까지 우리를 더 챙겨 주고 싶어 하셨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이리 처음부터 마음이 많이 가면, 그 만큼 작별의 시간도 꽤 이르게 찾아 온다. 잠시 머무는 곳인 만큼 빠르게 안정감 있는 집으로 이사 가는 건 너무나 기쁘겠지만. 이 분들과 헤어질 때에는 그 나름대로 감사한 만큼 기쁘게 슬플 듯하다.
할머니 집을 벗어나니 공간은 좁아졌지만, 우리의 숨은 한껏 넓어졌다. 지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좋은 사람들도 보인다. 오래 기다릴 줄 알았던 택배도 하루만에 도착해서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더 잘 되기 위해 이 좁디 좁은 공간에 온 거야. 이곳을 시작으로 우리는 이제 잘 될 일만 기다리면 돼.
잠시 잘 부탁해, 좁디 좁은 우리의 공간, 발코니가 있는 이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