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관찰이 곧 글쓰기 아닌가 싶다.
"내일 성수동 포인트오브뷰 다녀오자 사고 싶은 게 있어!"
평소 문구에 푹 빠져있는 여자친구의 제안으로 지난 일요일 성수동에 다녀왔다.
[나도 문구류 나름? 좋아한다.] 하지만 문구류에 울고 웃는 덕후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볼펜 하나에 3만 원, 비싸게는 30만 원 가까이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이게 맞는 가격인가?
볼펜을 예로 들었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종이 한 장 조차도 특별한 돌가루를 첨가한 메이커 회사 제품을 구입해 미세한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비싼 펜과 함께하는 필기감이라는 콜라보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비꼬는 것은 아니지만, 문구류가 필요 이상의 가격이라면 그건 취미. 즉 사치품의 영역이 아닌가?
그것이 내가 여자친구와 논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수동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긴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요 몇 년간 성수동은 팝업의 성지로 많은 메이저 기업들의 신제품 마케팅과 유명 예술가들의 전시예술 공간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맞다! 브런치에서 팝업 한 데서 거기도 둘러보자"
"브런치에서?"
브런치스토리 팝업이 성수동에서 [작가의 여정]이란 주제로 진행 중이었다. 전시장에서는 인턴작가 아이디카드도 만들어주는 이벤트도 있어 흥미가 생겼다.
도착한 현장에서는 많은 브런치 작가들과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앉아 글을 쓰거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입구에서 잠시 대기 후 설명을 듣고 우리는 각자의 스타일대로 관람을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평소 촬영이 가능한 팝업을 방문하면 애용하는 카메라로 전시장을 찍고 천천히 전부 둘러보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면, 나는 공간을 빠르게 둘러본 후 마음에 드는 작품 혹은 공간에 오래 머물며 천천히 한 가지를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브런치북을 꾸미고 표지 제목과 작가명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관람자들이 자신만의 브런치북과 필명을 고민하며 지웠다 썼다 하는 모습들에 묘한 고양감을 받아 그곳에 나도 머물기로 했다.
"글 쓰는 게 참.. 어쩔 때는 너무 힘들고 사무적으로 느껴지더라고"
"그럼 그건 단지 일감이지, 글감은 아니겠네"
절대로 엿들은 게 아니다. (중요★)
단지 나는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착석해 책상에서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었을 뿐인데 공간이 다소 협소해 작가로 보이는 두 명의 대화가 귓가에 살포시 다가왔을 뿐이었다.
작가들이라 그런지 글쓰기에 대해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며 다음 전시 때는 자신도 부스 한편에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작가가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대화 내용이 있었다.
'글을 써서 처음으로 주변에 온전히 내 감정을 전달한 게 언제인가'
나도 모르게 옛 추억이 떠올랐다.
2013년 12월 26일(목) 당시 안 하는 사람이 없다는 페이스북에 업로드한 에피소드이다.
당시는 대학교 1학년이지만 에피소드의 내용은 고등학생 시절 겪은 일화로 크리스마스 이후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냐는 친구들의 조롱에 감정 삭히며?! 풀어낸 글에 친구들과 댓글로 유쾌하게 웃고 떠든 게 생각났다.
아래는 당시 업로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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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명한 일화를 공개하겠다.
평소 성질이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던 G동 SS아파트에 사는 고씨의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고씨의 집은 1층이라 잦은 벨튀와 갖은 소음 난무하는 지상낙원이었다. 한겨울 고씨는 언제나 그렇듯 야자란 야간자율식사라 여기며 집으로 돌아왔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잠시뒤 현관 밖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고 고씨는 요즘 누가 현관 밖 사이드에 놓인 쓰레기 통을 쓰려트려놓고가 벼르던 중이었다. 고씨는 이때다 싶어 현관을 보여주는 인터폰을 켰고 경악할 만한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근처 J고 남녀 커플이 고씨집 앞에서 찐한 애정행각을 하고 있던 것. 그 장면을 인터폰으로 실시간 중계받던 고씨는 쓰레기통의 분노와는 다른 또 다른 감정을 찾게 되고..
인터폰의 수화기를 잡고 한마디를 외쳤다. "즐겁니?"
순간 현관 앞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J고 남학생은 쌍욕과 함께 나오라 소리치며 현관을 발로 찼고 고씨는 이에 강경 대응으로 경찰에 신고하겠다 하자 황급히 커플은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 뒤 고씨는 한동안 집 근처에 J고 학생들이 보이면 없어질 때까지 집에 못 들어갔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지났다 하니 급작 생각나서 푸는 이야기. 몇몇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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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글을 읽으면 그 당시 상황들과 감정들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진다.
'평소 말(썰)로서 했던 이야기를 처음 글로 남기며, 타인과 상호작용한 인생의 첫 글쓰기가 아니었나?'
지금이라고 크게 작문력이나 전달력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글쓰기의 재미와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한 것이 앞선 작가들의 대화 내용 중 [글을 써서 처음으로 주변에 온전히 내 감정을 전달한 게 언제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름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는 전공자도 기술자도 아니지만 주변과 충분히 재미있게 소통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엔 글쓰기란 기술이 아닌 소통의 방식일 뿐이니,
어렵지 않게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면 될 일인 것이다.
셋.
당시를 생각하면 "즐겁니?"라는 말 보다 좀 더 짓궂은 말을 하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아쉬울 뿐이다.
대신 더 길고 집요하게 J고 학생들을 피해 다녀야 했을 것이다.
'뭐 어때 그냥 그때 그럴걸 아쉽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