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말소리
미국식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에게는 호주식 영어가 어색하고 생소하기 그지없다.
발음이 익숙지 않아 아예 안들리거나 잘 안 들리기 일쑤다.
십여 년 전, 처음 호주에 도착하고 호주 사투리가 안 들려 어찌나 답답했던지 특유의 웅얼웅얼거리는 소리가 스트레스였다. 발음이라도 공부하고 왔으면 그래도 수월했을 텐데 호주영어를 딱히 가르쳐주는 학원이나 책이 없었다. 심지어 어학원 원어민 선생님들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뉴질랜드, 호주 등 다양한 영어권 국가 출신인데 학생들에게 미국식 발음으로 미국원서와 교재로 수업을 하셨다. 아마도 한국의 영어교육방침을 따랐던 것 같다.
그래서 호주로 오려는 레어버드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호주 사투리 발음 편을 간단하게 적어보기로 했다. 독특한 호주식 사투리 발음에는 약한 억양에서 강한 억양까지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단어마다 문장마다 문맥마다 그리고 발화자의 출신동네에 따라(예: 퀸즐랜드 북부출신인지 동남부출신인지) 발음이 조금씩 상이하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호주식 영어사투리라면 두드러지는 몇 가지 것들이 있는데 미리 알아두면 리스닝이 수월하기에 꼭 기억해 두자.
첫 번째, 단어 끝에 오는 R소리를 ‘ah’라고 발음한다.
예를 들면 clever → clev-ah, smarter → smat-ah, clear → cle-ah, fear → fe-ah, dear → de-ah, beer → be-ah, near → ne-ah, never → nev-ah 등등
미국식 영어의 R은 혀를 최대한 굴려 ‘ㄹㄹㄹㄹ’ 소리를 내는데 반해, 호주식 영어의 R은 우리말의 모음 ‘아’ 소리에 가깝다. 익숙하지 않지만 반복해서 듣고 따라 하다 보면 수월하게 익힐 수 있는 발음이다.
두 번째, 단어 끝에 오는 T소리를 누그러뜨려 발음한다.
다시 말해 T가 가진 본연의 파열음 소리 ‘ㅌ’ 소리를 내지 않고 입안에서 뭉갠다. 예를 들면 right → r-eye, alright → or-eye 같은 경우인데 영어 알파벳 표기로는 발음이 정확하지가 않다. 우리말의 근사치 발음을 찾자면 사이시옷 소리에 가깝다. 한국사람들이 고기+배를 같이 발음할 때 고깃배라고 사이시옷 ‘ㅅ’ 소리를 집어넣어 발음하듯이 호주사람들도 파열음 소리를 누그러뜨려 마치 right이 ‘롸이트’가 아니라 ‘롸이잇’이라고 소리낸다. Fight의 경우도 ‘파이트’가 아니라 ‘파이잇’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호주 드라마와 티비 프로그램을 보며 노출빈도를 높여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발음이다.
세 번째, 단어가 ing로 끝날 경우 꽤 자주 G소리를 발음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snatching → snat-chin, catching → cat-chin처럼 우리말 표음으로 ‘스내칭’이 아니라 ‘스내친’이라고 발음한다. Ing의 ‘잉’ 소리를 ‘인’ 소리처럼 말하는 게 강한 호주식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의 말버릇이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야, 나 지금 간다.'도 'Hey, I'm going now'가 아니라 'Oy, me goin now.'라고 말한다. going, coming의 끝에 오는 'g'를 빼먹고 발음하는 습관이 강한 호주 사투리다.
마지막으로 호주사람의 억양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고정적이고 빠르지만 유들유들함을 유지하는 게 특징이다. 아무리 긴 문장이라도 마치 한 덩어리 단어처럼 시냇물 흐르듯 ‘졸졸졸 줄줄줄’하고 발화하는 게 호주식 사투리 억양이다. 그래서 호주식 억양으로 발화하려면 입안에서 혀를 많이 굴리면 안 된다. 최대한 적게 혀를 움직이는 게 팁이라면 팁이다.
https://youtu.be/T_Ixz3Uv5Bo?si=e6nck9q2PkipwRoS
(코미디 영화라 조금 과장된 액션과 억양이지만) 영화 앵커맨 2의 클립을 보면 호주식 사투리 영어가 어떤 억양인지 확 와닿는다. 금발머리 호주남자가 중간에 ‘여러분들 다 같이 저를 따라 하세요’라고 하고 나서 ‘how bloody are ya?라고 외치는데 마치 한 단어처럼 주루룩 말하는 게 특징이다. 만약 이 소리를 알아들었다면 분명 호주식 억양에 익숙한 청자이다. 영화 속에서도 ‘how bloody are ya?’를 따라하지 못해 두 손을 입에 갖다 댄 채 ‘으르뷁뷁베ㄹㄹ’하고 외계어를 남발하는 스티브카렐의 과장된 연기가 엄청 재밌다. 꽤 많은 호주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큭큭거리며 폭소를 터뜨린다.
사실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 영어로 How are you?라고 물으면 ‘어떻게 지내?’로 들린다. 그런데 호주사람이 How are ya, mate? 혹은 How bloody are ya?라고 물으면 마치 내 고향 제주도말처럼 ‘어떵 살맨?’ 혹은 ‘어떵 지냄수과?’처럼 들린다. 그래서일까. 스트레스였던 호주사투리가 지금은 더 정감이 간다.
덧 1. 호주사투리 말습관
-문장의 끝에 but을 종종 붙여 사용한다. 일종의 일시정지, 한 템포 쉬고 다음 이야기를 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말버릇이다. 반대, 부정, 대조의 접속사가 아니라 ‘open end’로 대화의 끝을 열어두어 또 다른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선택의 여지를 두는 말습관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but으로 인해 ‘그래서 (쇼핑을) 갈까 말까?’라는 여지가 생긴다.
A: I want to go to the shops. (나 쇼핑 가고 싶어.)
B: We haven’t got enough time but. (우리 시간이 충분치 않은데.)
-강조를 할 때, 형용사 끝에 as를 붙여 사용한다. (특히 뉴질랜드 출신 호주사람)
전치사와 부사로 잘 알고 있는 영어의 as가 남반구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특히 뉴질랜드) 형용사 뒤에 따라와 느낌표를 얹은 것처럼 강조의 감탄사로 쓰인다. Adjective + as = Adjective! 예를 들면 상황에 따라 뜨겁네! 덥네! 혹은 맵네!라고 할 때 hot as = hot!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 관용적인 예외가 있는데 바로 Sweet as!라는 표현이다. 달콤하네!라는 뜻이 아니라 굉장하네!라는 뜻으로 Terrific! Awesome! 대신에 뉴질랜드 사람들이 자주 사용한다. 호주사람들은 아마 같은 의미로 Beauty! 혹은 Bonza! 아니면 Bloody good!이라고 더 많이 쓴다. 이런 말습관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같은 백인이지만 뉴질랜드 사람인지 호주사람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