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섞인 목소리로 민수가 운전 중인 최 씨에게 물었다. 최 씨는 대꾸 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게 며칠째냐고!?"
민수의 언성이 높아지자 최 씨는 차를 세우고 뒤돌아봤다.
"왜 나한테 짜증이야?"
"대체 언제까지 도망 다녀야 되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반복되는 그들의 다툼에 질려버린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해진 바깥세상은 고요했다. 민수와 나, 그리고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C양은 최 씨가 운전하는 이 캠핑카에 갇혀 도망 중이다. 우리를 쫓는 경찰들로부터.
"이제 아무도 없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시죠."
나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하, 이 맑은 공기란. 아마 민수와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인인 최 씨와 C양 때문에 우리는 낮에 캠핑카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라 하루 중 이 순간이 유일한 자유시간이다.
"경찰이 아직 우릴 쫓고 있다는 증거 있어? 적당히 하고 돌아가지 이제."
"돌아갈 곳도 없는 인간이 어지간히 불평하네. 넌 가족도 없지 않아?"
최 씨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민수를 쏘아본 후 차에서 내렸다.
"불은 제가 피울게요."
나는 최 씨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서둘러 차에서 장작을 꺼내 들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늘 그렇듯 불 앞에 둘러앉아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매슬로의 욕구 이론 있잖아요."
하루 종일 말이 없던 C양이 입을 열었다.
"인간의 첫 번째 욕구가 '안전욕구'래잖아요. 그것이 충족되어야 그 상위 욕구로 올라가고. 사회로부터의 인정, 자아실현 욕구 뭐 그런 거."
"아, 들어봤어요."
모두가 조용하길래 나는 아는 채 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 인간이 더 행복한지에 대한 연구가 있었나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욕구단계라고 표현하니까 얼른 윗단계로 올라가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한데?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써도 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갈구할 필요도 없고, 뭐가 되어야겠다는 고민도, 뭘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필요 없고.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에만 집중하면 되잖아요. 그것만 잘해도 지금처럼 성취감 느끼고. 나는 그래서 지금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러분도 은근히 이런 마음 아닌가요?"
"쟤 뭐래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지 그래. 몇 끼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민수가 짜증을 내며 콧방귀를 뀌었다.
"허허 그러게요. 영원히 도망 다녔던 탈주범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행복했을 수도 있겠네요."
참 별난 C양 답다는 생각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우리는 식재료가 떨어져 마트에 들러야 했다. 어느 때와 같이 내가 나가려고 채비했다.
"이번엔 제가 갈게요."
C양은 나를 막아서며 장바구니를 들었다.
"얼굴 다 팔린 애가 어딜 나가려고?" 최 씨가 핀잔 섞인 목소리로 돌아보았다.
"모자 쓰면 아무도 못 알아볼 거예요. 답답해서 그래요. 금방 다녀오면 되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그 사건 이후 시간도 많이 지났고... 사람들은 기억 못 할걸요?"
"그럼 저랑 같이 가요."
내가 나섰다.
"아니야. 정 그렇다면 얼굴 알려진 최 씨가 같이 가는 게 낫지. 붙잡히면 둘만 붙잡히고 거기서 끝나게. 괜히 네가 C양 옆에서 발견되면 곤란한 사람 한둘이 아니야. 하여튼 C양 유 별난 건 알아줘야 돼."
결국 민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최 씨와 C양이 장을 보러 갔고 민수와 나는 차에 남아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똑똑똑. 누군가 차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밖에는 평범한 옷차림의 남자 둘이 선텐이 쳐진 창문 안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있었다.
"누구세요?"
민수가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형사입니다. 조사 중인데 협조 좀 해주시죠."
형사? 나는 갑자기 거짓말처럼 온몸이 경직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흠. 침착하자. 침착해. 이럴수록 침착하자. "아... 네."
민수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한번 쳐다본 후 문을 열어주었다. 형사 둘은 캠핑카 안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는 문을 닫고 최대한 태연한 척 자리를 지켰다.
"무슨 사건이 발생했나 봐요?" 상황 파악을 위해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 최근 일은 아니고 좀 됐는데요. 어떤 사건이었더라? 이봐, 어떤 사건이었지?"
반장으로 추정되는 형사가 동료에게 물었다.
"그 예전에 유명인 둘이랑 공범이 두세명 있었던 사건이라는데 캠핑카를 타고 도주했다고 해서 우리 반장님이 캠핑카만 보면 이렇게 살피지 뭐예요. 근데 한참 돼서 그 사람들 아마 다른 나라로 튀고도 남았죠." "그 유명인들이 가수였나? 배우였나? 남자 둘이었나?" "어휴, 자세한 거까진 저도 기억이 안 나네요. 사건이 한 두 개여야지." "아, 나도 가물가 물구만. 그 공범들 몽타주도 전에 본 적 있는데 아마 아직 남아있으려나 모르겠네. 이름을 보면 기억 날 것도 같은데, 허허."
반장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이들의 무지함에 당황하고 있을 찰나, 창문밖엔 장을 보고 돌아온 최 씨와 C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나는 그 둘이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황급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구시죠? 거기 왜 서계세요? 얼른 가세요!"
그때 반장이라는 사람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어이, 거기 두 분! 지금 수사 중이라 여기 볼일 없으시면 얼른 가세요! 얼른!"
맙소사. 경찰은 둘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돌아앉았다. 뭐지?
"반장님. 여기 수상한 물건은 없는데 그냥 가시죠." "알았네. 자네 말대로 걔네 아무래도 해외로 뜬 거 같으니 대충 수사 마무리해야겠어. 실례가 많았습니다. 염치없지만 혹시 가는 길이시라면 저 앞 공원까지만 저희 태워주실 수 있나요? 워낙 더워서, 허허. 캠핑카가 참 좋네요."
민수는 대답 없이 차분하게 운전석에 가 앉았다. 굳이 이들을 태워주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민수 표정이 좋지 않아 나도 별말하지 않았다. 우리 그럼 이제...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가? 지금까지 형사와 마주쳤을 때의 긴박한 상황을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봤었지만 이런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얼떨결에 나는 형사들을 배웅하러 차에서 내렸고 민수도 내 옆에서 멀어지는 그들을 응시했다.
"잠시만요!" 민수의 외침에 반장이 뒤돌아봤다. "아까 마트 앞에서 캠핑카 옆에 서 있던 남녀요. 그들과 통화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네? 통화요? 왜죠? 됐습니다." "그러지 말고 통화 한번 해보세요. 지금 신호 가고 있으니까. 수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민수는 달려가서 반장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휴대폰 화면엔 수신인란에 최 씨의 이름 석자가 선명하게 떠있었다.
"최... 엇? 이 사람은?? 기억났어, 이 사람이 그 사람이지? 당신 이 사람 어떻게 알아? 당신이 혹시 공범이야?" "도망쳐!!!"
민수는 나를 향해 외치며 무작정 달려왔고, 나도 헐레벌떡 그를 따랐다. 정신없이 사람들이 많은 상가로 곤두박질치듯 달려가며, 문득 내가 미소를 띠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에겐 오늘 다시 또 할 일이 생겼다. 잘 해내기만 해도 대견한 일. 우리의 존재 이유. 내 앞에 달려가는 민수도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