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

끝나지 않은 나를 회수하는 밤

by 데브라

나는 요즘 가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앉아 있는 시간이 생긴다.


예전 같으면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손이 먼저 화면을 찾고,
화면이 먼저 나를 정리했을 것이다.


나는 늘 뭔가를 했어야 했다.
넘기고, 누르고, 저장하고, 삭제하면서
내가 아직 기능한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기능한다는 말은 편리하다.
편리한 말은 사람을 살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능하는 삶은
살아 있는 삶과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너무 늦게 배웠다.


어떤 날은 퇴근길에 비가 내린다.
구두 끝에 물이 튀고,
바닥의 웅덩이가 검게 고여 있다.


나는 그 웅덩이를 피하지 못한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그냥 지나간다.


그냥 지나가면
내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지나간 것들은
내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고도,
내 안에는 아직 비가 내린다.


그 비를 기록으로 바꾸면 편해진다.
한 줄로 요약하면 더 편해진다.
안전한 말로 정리하면 가장 편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편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의 나를
정리하지 않기로 한다.


정리하지 않은 마음은 어수선하다.
어수선함은 불편하다.


불편함은 늘 시간과 얼굴을 요구한다.


나는 그 비용을 내기로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내 얼굴부터 내게 내민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괜찮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그냥 머문다.


사이에는 늘 무언가가 있다.
우리가 요약하면서 버려버린 것들.
우리가 침묵으로 덮어버린 것들.
우리가 안전이라는 말로 밀어낸 것들.


그것들이 천천히 올라온다.


올라오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멋있지 않다.


나는 우아하지 않다.
나는 정돈되어 있지 않다.
나는 설명이 서툴다.


그래서 나는 사람 같다.


사람 같은 순간은

대개 불편하다.


불편해서 우리는 빨리 누른다.
불편해서 우리는 빨리 지나간다.
불편해서 우리는 빨리 잊는다.


그 빠름이
우리를 살려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빠름은
우리를 살려주는 대신
우리를 얇게 만든다.


얇아진 사람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린다.


흔들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는 더 매끈해진다.


매끈함은 선의처럼 보인다.
선의는 의심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완벽하게 사라진다.


나는 오늘
그 사라짐을 한 번 끊어보려고 한다.


큰 결심이 아니다.


그냥,
한 번 더 바라보는 것.


한 번 더 늦추는 것.


한 번 더 내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은 티가 난다.
티가 나는 순간,
나는 위험해진다.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평생 티를 지우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은
티가 나는 것이 나쁘지 않다.


티가 난다는 건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다시 화면을 켠다.
버튼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동의.
추천.
요약.
저장.


나는 그 버튼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 버튼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안다.


다만 나는 이제
그 버튼들이 나를 대신 말하게 두지 않기로 한다.


나는 아주 잠깐,
누르기 전에 멈춘다.


그 멈춤이 길어지면
내 안에서 소리가 난다.


작고, 느리고,
정리되지 않은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듣는 동안
나는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오늘도 떠올리려 한다.
내가 무엇을 내주고 있는지.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사실이
가장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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