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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연 Jul 13. 2022

나는 어떻게 통번역사가 되었나

서쪽 하늘에서 찾은 희망

며칠 전 내가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두번째달의 ‘서쪽하늘에’로, 2004년에 방영된 드라마 아일랜드의 OST 곡이다. 이나영, 현빈, 김민정, 김민준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당시 엄청난 히트까지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 덕분에 나름 매니아층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는데 어떠한 경로로 이 곡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어느 순간엔가 이 OST 앨범에 완전히 꽂혀서 한동안 매일같이 들었었다.


그 한동안이 언제였냐면, 바로 2004년 가을이었다. 그 해 여름에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다. 정확히는 권고 사직이었다. 이 회사도, 이 전 회사도, 이 전전 회사도,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 다니지 못했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수개월을 방황했고, 나의 자존감은 끝없이 낮아져만 갔다. 한 번은 집에 혼자 있는데 정말로 우울해 죽을 것 같아서, 동생 방에서 담배 한 대를 훔쳐와 내 방에서 몰래 피웠다. 일종의 소심한 자학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를 찬찬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이나 어차피 모두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마음을 바꾸어 먹고 나니 갑자기 희망이 마구마구 솟아올랐다. 이미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친구를 통해 스터디 파트너까지 소개받았다. 이제 열심히 공부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나는 ‘서쪽하늘에’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고 9시쯤 집을 나설 때면 MP3로 항상 이 음악을 들었다. 기타 선율이 조용히 깔리다가 바이올린이 메인 테마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나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귀로는 이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가을의 싱그러운 아침 풍경을 감상하며 길을 걸으면 모든 발걸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렇게 음악과 함께 시작된 나의 하루는 단조롭지만 확실한 루틴에 따라 돌아갔다. 아침에는 자습을 하고, 오후에는 스터디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 수업을 듣고, 밤에는 집 앞 독서실에서 그날 배운 내용을 꼬박꼬박 복습했다. 불확실한 미래가 문제였을 뿐 공부 자체는 너무 재미있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 남들은 길게는 몇 년씩 하는 공부를 한꺼번에 몰아서 하려니 필요한 내용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생각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와 마들렌이 주인공 마르셀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두번째달의 ‘서쪽하늘에’는 나를 순식간에 그때 그 시절로 돌려보낸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던 길, 그리고 그 길에서 느끼던 수많은 감정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막막함 속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일상을 어떻게든 행복하게 꾸려보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마음 속에 품고서, 음악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부터 지금까지, 나의 일상은 전적으로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내 평생을 통틀어 요즘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된 적은 없었다. 이것이 행복인가 싶다가도, 가끔은 나 자신을 잃은 것 같아서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중간중간 무료함과 권태로움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은 어떤 엄청난 계기가 아니라 일상 속의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전의 힘들었던 나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단단히 붙잡고서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던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며, 이제부터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 보기로 다짐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자리에 서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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