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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수 Jan 12. 2016

짝짓기를 못한 당신, 내일 동물이 된다

 [리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판타지 영화 <더 랍스터>의 매력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더 랍스터> 포스터

ⓒ 영화사 오원


이름 모를 여자가 승용차를 몰고 비가 내리는 도로를 달린다. 한적한 시골에 차를 세운 여자는 들판에 선 당나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서 총을 겨눈다. 서너 번 총성이 울리고 네발짐승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다. 빗물 젖은 차창 너머로 이를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인데,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묘사한 부분은 지난 2015년 11월 29일 개봉한 영화 <더 랍스터>의 첫 장면이다.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영화는 아무런 설명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카메라는 주인공 데이비드(콜린 파렐)가 조용히 탄식하는 모습을 비춘다.



아내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된 데이비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짐을 꾸린다. 이후 데이비드는 준비된 차량을 타고 이름 모를 장소로 '이송'된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가 도착한 곳은 도시 바깥의 아담한 호텔이다. 이곳에서 데이비드는 어쩌면 삶의 마지막이 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주어진 시간은 45일 : 사랑하라



 영화 <더 랍스터>의 한 장면.

ⓒ (주)영화사 오원, (주)브리즈픽처스



작가 노희경씨가 에세이에서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했던가. 영화 <더 랍스터>가 그려내는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랍스터>는 가까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세상에선 '커플'이 아닌 사람은 모두 수용소와 흡사한 호텔에 감금된다.



호텔의 운영 목적은 혼자가 된 사람을 모아서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다. 호텔 운영진에 의해 '둘이 다녀야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우스꽝스러운 교육(?)도 이뤄진다. '만남 주선 호텔'의 분위기는 일반적인 숙박 시설보다 군대 같은 기숙사에 가깝다. '솔로'라는 이유만으로 끌려온 이들에게 호텔 측은 '45일의 유예기간 동안 짝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동물로 변한다'는 원칙을 통보한다.



도시에서 연인을 잃고 한적한 시골의 호텔로 온 사람들. 절름발이 남자(벤 위쇼)부터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제시카 바든), 혀가 짧은 남자(존 C. 라일리)와 '배불뚝이' 주인공 데이비드까지. 호텔을 둘러보면 '어딘가 조금 부족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매일 아침 'OO일 남았습니다'라고 울리는 알람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이들의 일과는 사교에 열을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사이렌'이 울리면 마취총을 들고 나가서 인간을 사냥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커플이 되거나 호텔에 들어가기를 모두 거부한 '외톨이' 무리가 숲에서 도망 다니는데, 호텔 투숙객이 이들을 붙잡으면 '유예기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탈출 : 절대 사랑하지 말라



 영화 <더 랍스터>의 한 장면.

ⓒ (주)영화사 오원, (주)브리즈픽처스



영화 속 세상에서 홀로 남은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은 셋 중 하나다. 호텔에서 짝을 만나거나, 결국 동물로 변하거나, 아니면 마을을 떠나서 도망자가 되거나. 이쯤 되면 그야말로 '커플 천국, 솔로 지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데이비드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한다. 호텔을 떠난 그는 '외톨이' 무리로 들어가서 솔로 부대 지도자(레아 세이두)와 만난다. '반드시 짝을 만나야만 한다'는 강요나 유예기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데이비드는 안도한다.



기쁨도 잠시, 새로운 생활도 전혀 만만치 않다. 호텔 투숙객의 사냥감이 되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한다. 또 호텔과 정반대로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말라'가 원칙인 '외톨이'의 무리 속에서 데이비드는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과 닮은 여인(레이첼 와이즈)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만다. 키스라도 하다가 발각되면 '입술을 베어버리는' 형벌에 처하는 집단에서 둘은 위험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결국 어디에도 낙원은 없다. 한쪽은 짝짓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라 하고, 다른 쪽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있으라고 다그친다. 영화 <더 랍스터>는 '짝'과 '만남'으로 시작해서 억압적인 사회 시스템으로 서서히 시선을 돌린다. 그 안에서 적응하려고 애쓰는 등장인물의 표정을 보여주면서 개인의 불안을 표현한다. 한 명의 삶이 아니라 사회가 정해놓은 가치를 중심으로 가혹하게 돌아가는 세상, 초현실적인 설정의 영화가 우리네 현실과 맞닿는 지점은 바로 이런 부분 아닐까.



3포세대에겐 공포영화



개인의 연애와 생활에 국가가 간섭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들리면서도 마냥 낯설지는 않다. 최근 한국 정부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낮은 출산율에 '학제 개편'을 해결책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누리꾼들은 "공부하지 말고 애 낳으라니, 우리가 가축이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도는 다르지만,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막무가내식 처방'을 내놓은 것은 영화나 현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더 랍스터>에는 나름의 매력이 풍성하다. 미남 배우 콜린 파렐이 배 나온 중년 데이비드로 분장한 모습도 볼거리지만, 그가 보여주는 감정 표현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로 부족한 부분이 뚜렷한 사람인데도 닮은 점을 찾아가며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은 마치 실제 연인의 탄생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 같다. 전혀 다른 두 집단에서 위기를 겪는 상황 연출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더한다.



몽환적인 세계관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한몫한다. '연애를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는 기발한 설정도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고 곳곳에서 눈길을 사로잡을 장면을 만들어 낸다. 그러고 보면, 첫 장면에서 당나귀를 쏜 여인이 문득 다시 떠오른다. 어쩌면 그녀는 헤어진 옛 연인에게 복수라도 한 것이었을까?



"만약 짝을 못 만나서 동물이 된다면 무엇이 되고 싶느냐"는 호텔 매니저의 질문에 "랍스터"라고 엉뚱하게 대답한 남자. 성과 사랑, 관계를 다룬 영화지만, '연애 못하면 바닷가재'가 될 위기라니 '3포 세대'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공포영화일 수도 있겠다. 긴 연애에 지친 사람에게는 데이비드의 아찔한 모험이 탁월한 처방이 되지 않을까. 로맨스와 스릴러 사이를 오가는 색다른 분위기의 영화를 원하는 관객에게는 한 편의 잔혹한 '성인용 동화'가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이 기사는 오마이스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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