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등장해야 할 고대국가, '부여'를 향한 첫걸음

by deckle edge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

작년 여름, 평소 존경하는 강종훈 교수님(대구 가톨릭대학교)과 같은 차를 타고 속초에 가게 되었다. 나는 교수님께 평소 관심 있었던 ‘부여’에 대해 궁금한 것을 여쭈어보았고, 차 안은 곧 강의실로 바뀌어 운 좋게도 무료 고대사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으로 일본 학자 이케우치(池內宏)와 중국 학자 진위푸(金毓黼)를 알게 되었다. 이케우치는 부여사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고, 진위푸는 『동북통사(1941)』에서 부여 왕성의 위치를 설정하는 등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부여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한다.

역사를 서술한 주체가 ‘아(我)’인지, ‘비아(非我)’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의 발자취를 우리 스스로 되짚지 못하는 사실이 다소 씁쓸하였다. 고대국가 부여는 만주 지역에서 발원(發源)하고 성장하였으므로 위치상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힘들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위상에 가려져 역사적 위치를 정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점차 부여의 역사를 밝히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매우 반갑다. 그 대표적인 연구자가 송호정 교수이고,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이라는 부제를 가진 『처음 읽는 부여사』라는 이 책이다.

송호정 교수는 ‘최초의 고조선 박사’로 불린다. 우리 학계에서 고조선을 단독 연구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쓴 것은 송호정 교수가 처음이라고 한다.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고조선 국가 형성 과정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1999)』이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이러한 문구가 보인다.

“부여는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494년까지(오늘날 헤이룽장성과 지린성 일대인) 북만주 지역에 예맥족이 세운 고대국가다.”

부여에 대한 아주 간략한 서설(序說)이다. 그러나 부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압축한 말이다.

“어느 고대국가가 있었다. 그 국가 이름은 부여다. 부여는 북만주 지역에서 약 700여 년을 이어갔다. 부여를 이룬 종족은 예맥족이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목을 끄는 것은 존속기간이다. 같은 시기에 번영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700년 역사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국가의 존속 연대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영토국가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외침(外侵)이 빈번했던 시기에 700년을 지속했다는 것은 강력한 국방력과 체계적인 통치 체제가 마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부여는 누구나 눈독을 들였을 법한, 넓고 풍요로운 땅, 만주에 있었다.

‘부여’, 우리 문헌과 중국 문헌의 한자 표기가 다른데, 우리는 ‘扶餘’로, 중국은 ‘夫餘’로 썼다. 국가 이름에는 분명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 신라(新羅)는 ‘사방(四方)을 새롭게 망라(網羅)한다’는 뜻이요,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위대한 한(韓, 한반도 남부에서 비롯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말)의 민(民, people)이 주인 된 국가’라는 뜻이다. 그러면 부여는 무슨 뜻일까? 송호정 교수는 ‘사슴의 국가’라 추론한다. 사슴을 일컫는 만주어 ‘부위’에서 유래했다는 것으로, 동물을 토템으로 삼았던 고대 사회의 특성을 염두에 둔 적절한 추론이다.


책 후반부에는 부여에 관한 우리 문헌과 중국 문헌이 실려있다. 역사학은 학문 특성상 사료를 바탕으로 하므로, 독자를 배려한 노력이라 생각한다. 우리 자료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실었고, 중국 자료로는 『논형(論衡)』,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위서(魏書)』, 『북사(北史)』, 『신당서(新唐書)』에서 부여와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이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사료는 동북아시아에 살았던 우리의 삶을 잘 기록했다고 평가받는 『삼국지』다. 특히 ‘부여가 아주 부유했고, 3세기 중엽까지 한 번도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는 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록은 부여의 국가 체제와 위용을 드러내는 인상 깊은 서술이다.

대중서이기보다 학술서에 가까운 이 책에는 부여사와 관련된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의미 있는 사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사기』 화식열전에 나오는 조선과 부여 기록은 진시황 때(기원전 246~210)의 사실에 대한 내용으로, 이는 부여가 진시황 때 고조선과 함께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부여의 성립은 기원전 3세기 후반쯤으로 설정할 수 있다. (51쪽)"

"부여는 3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서쪽에서 세력을 키운 선비와 고구려의 압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힘이 점점 약해졌다. (80쪽)"

"원래 ‘사자(使者)’류는 씨족 내부에서 열등한 신분으로 조세를 총괄하는 관리였는데, 그 직능이 점점 중요시되어 여러 층의 사자로 분화되는 가운데 지위가 높아져 행정 관료로 성장했다. 이들 중 최고 직위인 대사는 외교를 전담하고 대가를 지휘하며 우가를 단죄하는 등 국정을 총괄했다. (103쪽)"

"부여의 산업과 생산물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지』의 ‘토지는 오곡(*쌀, 보리, 콩, 조, 기장)에 적합하고 오과(*복숭아, 자두, 살구, 밤, 대추)는 나지 않는다’는 기사를 통해 부여의 기본 생업이 농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9쪽)"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조는 “부여인은 높고 큰 체형에 기질이 용감하고 사나웠으며 사람을 정성스럽게 대하고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해 아주 잘 대접했다.”라고 전한다. (132쪽)"

저자의 지적처럼 부여사는 한국 고대사에서 ‘마치 부록 같은 존재’로 ‘방치’되었던 역사였다. 그러나 이렇게 방치되었던 시기는 해방 이후에 불과할 뿐, 고려와 조선, 심지어 일제 강점기에도 부여는 꾸준히 인식되었다. 늦게나마 지금이라도 부여사를 우리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하려는 노력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한 움직임에서 이 책은 분명 ‘첫걸음’이라 지칭할 수 있다. 반면, 지도와 유물 사진이 극히 적은 것은 이 책의 가장 아쉬운 점이다. 유물 사진의 경우,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 중국 박물관과 역사학계의 태도를 문제 삼을 수 있겠으나, 주요 지역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없는 것은 대중서로서 친절하지 못한 느낌이다. 다만 73쪽에 부여의 세력 범위를 나타낸 지도가 있어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친절하게 지도와 사진을 실어 이해를 돕는다면 부여사에 대한 더없이 좋은 대중입문서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