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고려 여행기

문경호,『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by deckle edge
문경호,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내가 저자를 알게 된 지 어느새 17년도 더 되어 간다. 저자는 당시 고등학교 역사교사였고,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여러 교육 프로젝트도 주도하는 열정적인 교사였다. 좋은 인연으로 소개받아 여러 프로젝트에 동참하면서 나는 저자의 훌륭한 점을 본받으려 노력하였다. 그는 나의 롤모델이었고, 지금도 변함없다. 지금은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나의 학위논문도 심사해 주신 깊은 인연이 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뵈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저자는 연구실에서 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셨다. 책 제목은 고려시대 전공자답게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이었다. 저자와 출판사가 의도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고려청자와 같은 비색(翡色) 표지가 눈에 띄었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옥색보다 깊고 맑은 푸른색’이었다.

‘고려도경’은 그리 생소한 책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시대사를 배우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고려의 역사는 조선에 비해 자료가 부족하여 필름의 빈 곳이 많은데,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여 쓴 ‘고려도경’은 그 빈 곳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서긍은 중국 송나라(960~1279) 때 인물이다. 1091년에 태어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은 호기심 많고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며,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현명하고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글씨를 잘 쓰고 문장력 또한 탁월했다고 전한다. 송의 황제 휘종(1100~1126)이 서긍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낸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지혜롭고 현명하며, 청렴하고 단정한 인품의 서긍이 책의 저자와도 겹친다.

‘도경(圖經)’은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고려도경은 고려의 풍광을 글로만 전한다. 서긍이 고려에 다녀온 후 황제에게 바친 책 외에 한 권을 더 써서 자기 집에 놓았는데, 이웃 사람이 빌려간 후, 금이 송나라의 수도를 함락하는 ‘정강의 변(1127)’이라는 난리가 난 틈에 책이 분실된 것이다. ‘고려도경’의 원본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의 아쉬움이다.

서긍은 고려의 모습을 꽤 정밀히 기록하였다. 건국(建國), 세차(世次), 성읍(城邑), 궁전(宮殿), 인물(人物), 거마(車馬), 도교(道敎), 민서(民庶), 부인(婦人), 풍속(風俗), 주즙(舟楫), 해도(海道) 등으로 구성된 ‘고려도경’의 28개 주제만 보더라도, 앉아서 천리를 꿰뚫어 볼 만큼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알 수 있다. 서긍이 ‘고려도경’을 저술한 목적 자체가 고려와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여 여진(금)을 막으려는 송나라의 의도와 더불어 고려의 사정을 염탐하려는 민족지 성격도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번역하거나 해제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목적으로 책을 읽으려는 예비 독자가 있다면, 조동원 등이 옮기고 황소자리 출판사에서 발간한 ‘고려도경’이나, 한국고전번역원이 옮기고 서해문집에서 출판한 책을 보는 편이 낫다. 이 책은 저자에 따르면, 서긍의 입장에서 다시 서술한 이야기다. 그러나 서긍이라는 인물을 1인칭 주인공으로 서술하였다기보다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또한 저자는 원본 ‘고려도경’의 순서도 재구성하여 서긍이 송에서 고려로 오가는 여정대로 서술하였으므로, 원본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며, 더욱 쉽고 참신하게 ‘고려도경’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서긍은 여행이기보다 공무(公務)를 목적으로 ‘고려도경’을 썼을 테지만, 우리가 여행기(旅行記)로서 바라보려는 요구를 저자가 알아챈 것이다.

그러나 원본을 재구성하여 글을 쓰기까지 저자의 고민과 노력이 얼마나 많았을 것임은 추론하기 어렵지 않다. 저자의 글은 이해하기 쉽다. 그의 논문만 보아도 일체 비문이나 군더더기 없이 쉬우면서도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게 논지를 이끌어간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도 읽다 보면 간결해지고, 어느새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그러한 필력을 가진 저자라도 고전을 재구성하고 고려의 역사(歷史)를 곳곳에 녹여내어 이야기로 서술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저자의 폭넓은 역사 지식과 역사적 사고력, 문학적 재능과 심지어 위트까지 엿볼 수 있는 점은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러나 역사 지식이 많지 않은 독자는 첫 장을 넘기면서 자칫 지루할 수 있다. 총 13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1장은 서긍에 대한 인물 설명, 2장은 12세기 동아시아의 역사, 3장에서는 송과 고려의 선박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다. 여기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닌 고려시대 전공자의 입장에서 쓴 일반적인 역사책에 가깝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구성된 본론은 4장부터 시작되어 마지막 장에서 끝을 맺는다. 장 외의 ‘나가면서’에서는 ‘고려도경’의 사료적 가치와 더불어 오늘날의 관점에서 12세기 동아시아 상황을 보며 ‘고려도경’에 주목하는 이유를 달았다. 대내적으로는 탄핵 이후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트럼프 미국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독주에 현명하게 대응해야 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 책의 메시지가 마치 울림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저자가 서긍의 입장이 되어 12세기 고려를 바라본 것이다. 저자를 빌려 서긍이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듯 고려 여행기를 다시 쓰게 된 격이다. 자칫 지루하고 딱딱할 수 있는 원본 ‘고려도경’을 여행기에 익숙한 오늘날 독자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점이 읽는 내내 참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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