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도올 김용옥, 새 시대의 새 지도자 몽양 여운형, 통나무, 2025

by deckle edge
도올 김용옥, 새 시대의 새 지도자 몽양 여운형, 통나무, 2025


비상식적인 계엄과 그로 인한 탄핵, 그리고 국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집권한 이재명 정부도 어느덧 9개월째 접어든다. 지금이 새 시대인지, 아니면 새 시대를 위한 준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무언가 변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도올 선생이 새로운 책을 냈다. 초판 발행일은 202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을 맞이한 지 정확하게 80년이 되는 때이며,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은 지 두 달여가 지난 시점이기도 하다(21대 대통령 선거일 2025. 6. 3. 화). 제목은 ‘새 시대의 새 지도자 몽양 여운형’. 우선 과거인이 새 시대의 지도자라니, 시간적으로는 모순된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몽양 여운형 선생(夢陽 呂運亨, 1886~1947)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책표지를 본다. 카메라가 아닌 어딘가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날렵한 코, 꾹 다문 입술과 그 위의 콧수염. 넓은 이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양복과 넥타이. 양복 포켓 사이에 가지런히 찔러 넣은 만년필. 탁월한 혁명가였던 그의 안광(眼光)이 굳세면서도 처연하다.

도올 선생은 책의 질서를 선생답게 배열하였다. 각 절의 구성이 형식적이지 않고, 거침없으며, 평소 강의하는 말투가 느껴진다. 각 장의 핵심 키워드는 ‘체육’, ‘동학’, ‘3‧1 독립만세혁명’, ‘신한청년당’, ‘동경제국호텔 연설’, 그리고 무려 80페이지를 할애한 ‘연표’이다.

몽양(‘夢陽’은 그의 어머니 경주 이씨가 태양을 치마폭에 감싸안는 태몽을 꾸자, 몽양의 조부 여규신이 지어 준 호다. ‘태양을 꿈꾸다’는 뜻. p.118)은 체육을 강조하였다. 체육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생동(生動)할 수 있는 바탕이다. 독립을 추구할 수 있는 원기(元氣) 임은 말할 것도 없다. 체육과 관련하여 현 용인대학교(전신 대한유도학교)의 설립자인 이제황(李濟晃, 1910~1981)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이 소개된다. 이제황 선생은 몽양의 경호실장이었고, 손기정 선생은 몽양이 후원한 선수였다. 특히 손기정이 우승한 후, 몽양이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가 일장기를 지워 보도함(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 1936. 8. 13일 자 제4면, p.80)으로써 결국 신문이 폐간되고, 이로써 몽양이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고 건국을 준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얼핏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동학(東學)도 몽양의 삶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몽양의 조부 여규신(呂圭信)과 숙부 여규덕(呂圭德)은 모두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과 대면하였고, 특히 여규덕은 해월에게 동학 경전이자 한글 가사인 ‘용담유사(龍潭諭詞)’를 충북 단양의 자택에서 간행할 것을 제안하여 성사시켰다(p.106). 동학의 여러 역사자료는 여규덕과 여규신을 초기동학의 효시라고 적고 있고(p.114), 몽양은 어린 시절부터 조부와 숙부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니, 몽양의 혁명정신도 기저에는 동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백미(白眉)는 3‧1 운동(이 책에서는 ‘3‧1 독립만세혁명’)과 신한청년당, 그리고 몽양과의 관계를 밝힌 부분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3‧1 운동의 배경으로 신한청년당의 외교활동을 언급한다. 또한,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의 민족자결주의를 말한다. 우선 신한청년당은 그 역사적, 맥락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정당’(신한청년당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근대정당이다. p.158)이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을 위한 대표로 파견한 것 외에도, 몽양이 예관 신규식(睨觀 申圭植, 1879~1922)의 비호 아래 설립하였으며, 3‧1 운동의 시작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p.164). 이로써 교과서에서 누락되고 흩어져 있던 ‘신한청년당-2‧8 독립 선언-3‧1 운동’의 퍼즐이 분명히 맞추어지게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몽양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3‧1 운동을 주도한 세력을 어찌 민족 대표 33인만으로 확언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몽양이 적지(敵地)에서 내로라하는 일본 대신과 일대백으로 논쟁하는 장면은 압도적 긴장감과 전율, 그리고 몽양의 사상에 관한 일말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 몽양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한 일제는 몽양을 누르기 위해 교활한 작전을 세워 동경제국호텔로 부른다. 여기서 몽양은 그의 사상이 묻어나는 명연설을 하며 오히려 일본인의 정신을 흔들었다. 이에 앞서 당시 일제를 이끌었던 여러 대신들과 담판하여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요즘말로 ‘참 교육’하는 장면에서는 전율이 느껴진다.


몽양은 말한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자연의 원리이다.” 몽양은 조선의 독립이 자기 생존을 위한 자연의 원리인 동시에 인간의 원리라 했다. 독립은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 그리고 우주생명의 본질인 것이다(p.212). 이 얼마나 명쾌한 설명인가! 상위철학적인 분석인가!


책의 말미는 연표다. 도올 선생이 말하였듯이 ‘몽양시대’의 사건과 인물을 시간순으로 나열한 것인데, ‘몽양시대’라는 말이 궁색하지 않을 정도로 관련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새로운 맛이다.

우리는 몽양에 대해 그동안 너무 몰랐다. 조선건국동맹과 그에 이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었고,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중도좌파 독립운동가 정도가 몽양에 관한 교과서적인 평가였다. 해방 직후 친미‧친일정권이 설립‧유지되는데 걸림돌로 여겨지면서 피하지 못했던 그의 죽음만큼이나(1947년 7월 19일 낮 1시 15분경,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저격당해 서거, p.296)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외면되었다.


이 책은 말한다. 몽양이 새 시대의 새 지도자로 적합한 이유는 탁월한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융화(harmony)’라는 인간 생존을 위한 덕목 때문이라는 것을(p.19)! 양극단의 대립이 심해지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자기 이익만을 쫓고 있는 맹목적인 우리 사회에 몽양이라는 불세출(不世出)의 과거인은 ‘융화’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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