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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Dec 06. 2021

플라톤을 변호해 보겠습니다.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플라톤 철학의 추종자가 아님을 밝힙니다. 그의 철학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고,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 문제들을 평가하는 도구로써 그다지 유용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선을 화성으로 내보내는 오늘날의 우리 인류가 그의 철학으로부터 덕을 보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태어나기 전후의 아테네는 시민 간의 평등과 투표제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은 도시국가였습니다. 1,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이기고 나서 그 자부심은 절정에 달했죠. 물론 그 민주주의에도 불안한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청렴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리스티데스는 단순 재수 없다는 이유로 도편 투표에 의해 추방당했다가,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복권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최고사령관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회의 도중 하도 방해에 시달리다가 “날 때려도 좋으니까 일단 말부터 하게 해 주시오”라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아테네 시민군들은 적군이 코 앞에 있는데도 멋대로 부대를 이탈하여 집에 갔다가 복귀하기도 했죠.


신기하게도 내부적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테네, 그리고 그리스 동맹은 페르시아군의 침공을 저지합니다. 그러다 양대 폴리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 강자를 가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민주주의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맙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제독들이 아군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시민 투표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죠. 이는 어처구니 없는 해군력 손실로 이어졌고, 패전의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한편 제독들의 사형을 마지막까지 반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 소크라테스도 패전 후 얼마 안 가서 민주주의식 시민 투표에 의해 독배를 마시고 눈을 감아 버립니다.


이 때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 갖는 감정은 환멸 그 자체였습니다. 멍청한 다수가 똑똑한 소수를 짓누르는 체제로 인해 패전으로 모자라 스승의 죽음까지 목격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죠. 그래서 국가의 정치는 똑똑한 사람이 주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철인 정치’의 탄생 배경입니다.


그럼 철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똑똑하고 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지(知)가 곧 선(善)입니다. 아무리 잔혹한 방식으로 독재자(참주)가 된 사람이라도 그가 똑똑하다면 시민들의 환심을 사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공병원을 짓거나 저소득층의 교육비를 면제하는 등의 친시민적 정책을 펼칠 것입니다. 일반인을 기준으로 삼자면, 멍청한 사람은 눈 앞의 이익만을 좇다가 나쁜 꼴을 보게 될 것이고, 똑똑한 사람은 눈 앞 이면의 장기적, 포괄적으로 이루어질 보상들을 계산하며 희생을 감수할 것입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론은 명나라 중기의 왕양명이 주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과 높은 일치율을 보입니다.


똑똑해지고 싶으면 착하면 되고, 착해지고 싶으면 똑똑하면 됩니다. 더 똑똑함, 더 착함 위로 쭉 올라가면 궁극에는 진리 또는 이데아가 있습니다. 똑똑함, 착함이 만져지지 않듯 이데아도 만져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만나고 싶다면 눈 앞 이면에서부터, 즉 정신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데아적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테네 시민들은 각자가 형태가 다른 불량품들이자 불완전한 모방품들입니다. 그런 시민들을 통치하는 철인 자리를 불량품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니 얼른 이데아적인 인간, 하다 못해 그런 인간에 근접한 모방품이라도 찾아야겠죠. 그럼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만한 이데아적인 인간은 바로 어떤 인간인가? 아니, 애초에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대상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네, 있습니다.


연필을 컴퍼스에 꽂고 예쁘게 원을 그려 봅시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그림은 그냥 흑연 자국이고, 진짜 원은 컴퍼스 사용자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3’이라는 숫자는 세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물건을 세거나 줄자로 길이를 잴 때 그 숫자를 떠올리죠. 이처럼 인간은 모두가 보편적으로 완벽한 원, 완벽한 정사각형, ‘3’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플라톤은 보편적 지식에 도달하려면 도형과 숫자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설립한 학술 기관인 ‘아카데미아’ 현관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적어 놓습니다.


시대는 흐르고 흘러 유럽에 르네상스 시대가 오고, 플라톤 철학도 재발굴됩니다. 폴란드의 성직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에서 플라톤 철학을 배웁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 너저분한 불량품과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지구 주위로 태양과 달이 돌면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도 동일한 궤도로 돌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테네 시민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되돌아오는 것이었죠. 대충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양을 중심으로 놓으니까 달을 제외한 다섯 행성이 ‘보편’적으로 원을 그리게 되었죠. 플라톤을 추종하는 소위 네오플라토니스트들 사이에서는 곧 코페르니쿠스의 천문 모델이 정설로 퍼지게 됩니다. 이 사건을 가리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파격적인 혁신의 대명사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플라톤이 근대 과학사에 영향을 남기지 않았다고 볼 수 없겠습니다.


또 플라톤의 영향이라 하면 아이작 뉴턴을 빼 놓을 수 없죠. 사실 뉴턴은 스스로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며 귀납주의자임을 밝혔기 때문에 플라톤과 정반대의 인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도 플라톤 사상이 스며든 종교까지 피하지는 못했죠. 비록 뉴턴은 성서를 다소 부정하는 스탠스를 취했지만 그의 스승이자 신학자였던 헨리 모어의 영향을 받아 우주에 보편적 진리가 작용한다고 믿기는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눈 앞 이면에 존재하는 ‘힘’에 눈 앞 이면에 존재하는 ‘숫자’, 즉 ‘f=ma’ 같은 수식을 적용하는 등 역학 체계를 집대성했습니다. 뉴턴이 인류에 남긴 족적을 고려한다면 플라톤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저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실 도피처가 아니라, 오히려 대안책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눈 앞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비현실주의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겠지만, 만물을 보편의 이름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정신이 인류사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재평가의 가치가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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