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조 인간

by Om asatoma

시마다 마사히코의 악마를 위하여, 천국이 내려오다,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을 전해준 선배가 있었습니다.

모조 인간이라는 필명을 썼던 선배예요.


대학교 1학년 때였어요. 선배는 당시 예비역으로 복학한 95학번쯤 되었던 것 같아요.


큰 키에 호리 한 몸으로 책 읽는 공대생이었습니다.

어쩌다 친해진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딘가 대화가 잘 통하는 구석이 있었어요.


때로 전화통화도 한 것 같고

마산 창동 서점에서 한 번,

창원대학 앞 찻집에서 한 번 따로 만난 것 같아요.

주로 책 이야기나 나름의 궤변을 나누는 사이였어요.


선배의 생일이 11월 29일이었는데

겨울이 오기 직전의 쓸쓸한 날씨와 선배가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당시의 저는 손글씨로 현수막에 생일 축하의 말을 써서

모교의 중앙도서관 앞에 걸었던 기억이 있어요.


요즘 기준으로는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내가 받아보고 싶었던 것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선배가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특정한 에피소드에 내가 어린날 살았던 집과 우리 외할머니가 인물로 등장했어요.


선배의 어린 기억 속에 있던 어떤 집이 내가 살던 집이었던 거지요.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에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네요)


이성관계라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 선배도 말이 잘 통하는 후배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것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저 둘이 어떻게 친해졌는가에 호기심을 가지며 특별한 관계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담배를 피우던 가늘고 긴 손가락과

담배를 빨아들일 때 움푹 들어가던 양 볼과

뿔테 안경 너머로 뚫어지듯이 응시하던 눈과

신해철의 노래를 좋아했다는 것 외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네요.



어떻게 해서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는지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에 대한 기억도 없어요.


다만 선배가 어느 순간 휴학을 하면서

캠퍼스에서 사라진 것 같아요.


과거의 저의 모습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기도 하고

어쩌면 1999년의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겠네요.

그러고 보니 여중과 여고를 나온 제가

처음으로 친하게 지낸 이성이네요.


4차원이 4차원을 만난 해이지요.



문득,

선배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다시 만나도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한 선배와

재미있다는 듯 귀 기울여 들어줄 후배의 포지션은 여전할 겁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기를.

아무 일 없이..


11월 29일에 20년 만에 선배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때가,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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