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m asatoma Oct 15. 2024
23:00
끝내 그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곁을 가지지 못한 채
이 공간 어디선가 들리는 그의 목소리 만으로
이 밤이 얼마나 길고 긴지만 확인해야 했다.
라고 첫 문장을 쓰리라 되뇌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오래전 혜화 로터리의 밤을 떠올리며.
...
16:00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맞았나에 대한 의심이 아직 남아 민망한 자의 길고 긴 변명
한 남자가 내 이름을 마음대로 정해버렸고,
나는 그렇게 불리기를 허락했다.
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였나 새삼 놀라운 가을 낮이다.
밤에는 얼마나 더 쉬워질까.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준 남자는
2010년 10월의 한 남자 밖에 없다.
평생 그의 여자라는 의미라 혼자 생각하고 그 강제함이 주는 자극을 즐기는 이상한 여자에게
2024년 10월 '어느' 남자가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일종의 밥줄이기도 하고,
그가 붙인 내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한,
나의 이름이 아니라 민망하여 이내 빼버리기는 했으나
그가 붙여준 이름대로 되고 싶다는 마음을 깊이 새기게 했던 이름표 목걸이.
축하의 마음으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려 했다.
기회가 되면 사진 한 번 찍고 돌아서려 했다.
지역민으로서 인근 주민으로서 지나다 들른 사람으로 사라지려 했다.
그럼에도 그 하루가 끝날 때까지
정말 나답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었던 것은
그가 보인 일련의... 일련의... 정성이라 하기에도 성의라 하기에도 죄송한
생각지 못한 어떤.. 어떤.. 마음이 담긴 행동들이 있었고,
그러한 과한 환대에 어떻게든 최소한의 아니, 최대한의 응대를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함께 찍은 사진
유명한 사람들과 사진 찍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사진일 뿐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내가 그 사람에 어떤 의미도 아니라면,
한쪽은 다른 쪽의 이름도 알지 못할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사진에 찍히기를 기다리는 그 어색한 시간과 그 어색한 마무리를 나는 즐기지 않는다.
5년 전에 처음 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분은 시인으로서 특강을 하러 왔고,
세 시간 동안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에서 유자향이 났는데,
그 무엇보다
지방의 한 지역을 대표하는 그 시인을 보면서
그 지역을 말할 때, 누구나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서
나도, 진해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고 싶다는 의미에서(차마 진해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무리 익명의 개인적인 브런치라도 쓰지 못하겠고), 진해여자라는 이름을 갖게 해 준 그 이기 때문에 그는 충분히 내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는 나를 알지 못하였지만, 나는 그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후 부산에서의 어느 행사에서 그를 보게 되었고, 나는 그날 밤이 생각나 혼자 반가운 마음에 또 그의 옆에서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곁에 서고 싶었는데, 워낙 밀려드는 사람들로 곁에 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곡된 기억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날이 아니고는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10.12. 집에서 아주 아주 가까운 곳이라 하니, 어디라도 찾아가 만날 수는 없는 사람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으로 온다 하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17:00
만져보고 싶었다니!
나한테는 그런 말만 들리는 것인지
비파나무와 감나무 사이에 선 남자가
비파나무를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의 앞뒤로 뭔가 더 의미 있고 훌륭한 말들이 있었을 텐데
그 한마디만 남아있다.
시인들은 그런 표현을 즐겨 쓰는가.
시인들의 표현법인가.
18:00
만남
15년쯤 전에 -에서 만났던 분
5년쯤 전에 -에서 만났던 분
며칠 전 -에서 만났던 분
그리고 예기치 못한 합석으로 만난 귀한 분들.
수첩이 없어서 핸드폰 메모장이라도 꺼내 정말 받아쓰고 싶었는데
초면에 핸드폰을 잡고 있기가 실례일 것 같아
귀로 듣고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되뇌게 한 말씀들을 하셨던 귀한 분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분들이 살아오신 생이 선명하게 새겨진 한 조각을
운 좋게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던 시간.
그러나 그를 볼 수는 없었다.
어느 먼 구석자리라도 그의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는 자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를 볼 수는 없었다.
그날의 그를 기억하고 싶었다.
어떤 표정,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 존재하였는지를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었다.
20:00
사실은 무리한 일정이었다.
지난주의 일정이 함양/서울/장유/부산/김해..
그와의 밤을 위해서는
잠시라도 따뜻한 샤워가 필요했다.
앉아있을 에너지도 없었다.
그의 방은 빌릴 수 없으므로! 집에서 얼른 샤워를 하고
아끼는 빅토리아시크릿 라벤더 릴랙스 오일을 아낌없이 발랐다.
장소로 출발하려는 데 전화가 왔다.
사실, 그 전화가 참 고마웠다.
21:00
세계의 경험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할 수 없었던 경험들을 전해 듣는 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듣는 일,
그들의 지난 삶과 현재의 생활에 대하여 듣는 일,
이 세계를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누구의 이야기를,
이 순간의 음성과 눈빛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아쉽게도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뜻밖의 만남을 통해 그러한 영광의 순간을 가짐.
그런 우연을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 만큼
멋진 자리였다.
01:30
취한 것이 확실했다.
어둠 속 냉장고 앞에 서서 화이트 와인을 병 채 들고 마시는 순간,
내가 취했음을 인지했다.
그러고 보니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조금 비틀거리고도 싶었던 것 같고,
아주아주 멀쩡히 귀가해 현관문을 들어오면서부터 긴장이 풀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