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포기를 잘 못 한다.
오기가 있는 편이고, 자존심도 세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욕심도 많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새해에 사주 보러 갔는데, 나보고 욕심이 진짜 많다고 했다.. 저항 없이 ‘헐.. 마쟈여..’해버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다 해내고 싶은 마음에 꾸역꾸역 일정을 밀어넣고, 이것저것 일을 벌리는 경우가 많았다. 왜? 당장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면 성과도 따라오고 집에 누워만 있었다면 못 했을 값진 경험을 하기도 해서 그 도파민에 계속 달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한 체력은 아니니까 계속해서 이런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재작년 말, 작년부터 벌써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나서 이제 좀 쉬엄쉬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어디 사람이 쉽게 바뀌나.
늘 끊임없이 사부작 사부작 뭘 하고 있던 관성, 아무것도 안 하면 시간을 버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불안감, 모든 시간을 꽉꽉 채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말로는 ‘이번 달은, 이번주는 좀 쉬어야지’ 말만 하고 실상은 여전히 똑같은 패턴으로 여유라고는 1도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최근에 사소하지만 몇 번, 그렇게 어려워하던 포기를 실천해봤다. 그 결과 느낀 감정은 의외로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후회나 자책, 자괴감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홀가분함’ ‘자유로움’에 가까운 감정을 훨씬 더 많이 느꼈다.
그 사소한 경험이란 이런 것들이다.
설 연휴였던 일요일, 연휴라 여유로우니까, 하며 일정을 하루에 3개나 잡았다.
오전 독서모임, 저녁 낭독회 모임, 그 사이에는 고흐 전시회. 고흐 전시회는 당근에서 웃돈 주고 구매한 얼리버드 티켓 사용일이 이 날까지여서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엄청난 인파로 2시간 대기가 있었다. 입장한다 해도 1시간 만에 급하게 보고 나와야 낭독회 시간에 빠듯하게 맞출 수 있었다.
고민 끝에 결국 관람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티켓 가격 18000원과 예술의 전당을 오간 시간과 체력을 날렸다.
대신 얻은 것은 인파에 치이지 않음으로 인한 체력 세이브, 낭독회를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이었다.
전시가 이 날이 마지막도 아니었고, 좀 더 여유로운 날 다시 가면 될 일이다.
날린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속은 꽤 쓰렸다) 대신 세이브된 체력과 시간은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원래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꾸역꾸역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려 했겠지만, 이날은 아무리 봐도 무리여서 포기했는데 ‘어라, 포기를 해도 괜찮은데? 오히려 좋은데?’ 이게 갑자기 확 체감이 됐다.
그동안 지쳤던 것이 무엇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마음 (어쩌면 욕심)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기도 하고 (애초에 무리한 계획을 세워선 안 됐다. 애초에 이 사태가 벌어진 것도, ‘고흐 전시회를 좀 싸게 보겠다’는 마음을 포기 못 해서 벌어진 일이다. 섣불리 당근 거래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가보다도 더 비싸게 본 꼴이 됐다..ㅎ 멍청 비용+교훈을 얻은 값이지 뭐..).
몸이든 마음이든 힘들다면 이미 무리하고 있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가장 덜 중요한 걸 포기하면 잃는 것 또는 하지 못 해서 아쉬운 것보다 그로 인해서 얻게 되는 여유로움이 더 긍정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두번째 사례는 11월에 시작한 이후로 매달 두번씩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열었던 낮술낭독회 모임을 2월은 스킵한 것이다.
사실 2월에도 열고 싶어서 모임 날짜도 정해두고, 공간 사용 여부도 조율해뒀다. 그간 꾸준히 열었는데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고, 지난번에는 처음으로 정원 마감이 되었을 정도로 이제 모임이 안정화되어서 본격 궤도에 오르는 것 같아서 이 상승세를 계속 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낭독회 준비할 때는 매번 좀 귀찮고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열고 나면 언제나 즐겁고, 오신 분들이 만족해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즐거운 자리를 만들어줬다는 뿌듯함도 제법 쏠쏠했다.
2월에는 조금 색다르게 모임을 열어보려는 새로운 아이디어도 있었고, 정말 재밌을 것 같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무조건 열었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두었던 날은 주말이었고 (오늘이었다) 하루종일 아무 일정 없이 비어있는 날이었다.
저녁 시간 할애해서 모임을 여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훨씬 더 빡센 일정일 때도 어떻게든 밀어넣어서 3개월을 했는데..)
그런데 포기하는 것의 기쁨을 지난번 작게 체험한 후로, 여유라는 것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엑스트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뭘 포기하지 않아도 여전히 여유가 남을 만큼 내 인생이 여유로우면 좋겠지만, 월-금 하루종일을 직장에 매여 있는 직업을 선택해서 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어차피 망상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낭독회를 포기했다.
‘지금 낭독회를 여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생각해봤을 때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3개월간은 낭독회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험하는 것이 나에게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집중해야 할 새로운 더 큰 사이드 프로젝트가 생겼기 때문에 (1월중 갑자기 해보자는 마음이 들어 결정하게 되었다..!) 낭독회보다 그것에 체력과 에너지, 시간을 쏟거나, 비축해 두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낭독회도 하고 이 사이드 프로젝트 준비도 하려고 했겠지만 (물리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정이 아니니까), 지난 몇 년간의 고군분투를 통해서 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가능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낭독회를 열었다면 또 어느 정도 에너지를 소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이드 프로젝트 준비에는 아마 이 날 전혀 시간을 쓰지 못 했을 것이다.
무한 체력이라 둘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체력의 한계는 그 정도다. 나의 한계를 알게 된 것이 지난 몇 년간의 숱한 좌절과 계획 지체, 미달성의 성과다.
그리고 정말 쉽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하루의 시간과 에너지가 100%라면, 100%를 꽉 채워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가 않다. 70-80%만 써도 나라는 인간은 녹초가 된다. 내가 특별히 이상한 것도 아니고, 아마 대부분 그럴 것이다.
정말 독하거나 절박한 필요가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그것도 한정된 시간 동안만 100% 혹은 120%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가끔 진짜 급하거나 절박할 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해서 100%, 120%를 쓴 적이 있다. (보통 시험 벼락치기나, 마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다들 그런 경험을 할 것이다.. ㅎ)
하지만 평상시에는 절대 그렇게 살 수가 없다. 내가 나약해서도,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그냥 인간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사실 진짜 열심히 하면 70-80% 쓰는 게 정상이고, 행복하게 살려면 50%만 쓰는 게 적정하다고 생각한다..ㅎ
컴퓨터나 핸드폰도 예를 들어 용량이 128GB라고 해서 128GB를 꽉 채우면 안 돌아가지 않나.
100이 있으면 100을 다 써야 최고로 효율적이고 잘 된 거라고 생각하는 마인드를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늘 100%를 하는 것을 암묵적인 기준으로 정해두고 그에 못 미치면 늘 부족하고, 못 해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고군분투를 했어도 나에게 나는 늘 실패자에 가까웠다. 100%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해로운 영향을 주는 나쁜 생각인 이유다. 스스로를 실패자로 자꾸 내면화하기 때문에.
예전에 읽었던 ‘게으르다는 착각’ 이라는 책에 우리가 늘 100%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말이 나와서 정말 유레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의 습관, 가치관이란 게 참 안 변해서 그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또 100%를 기준점으로 맞춰두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2-30%의 시간을 남겨두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어랏? 저기 빈 시간이 있는데?’ 하고 자의든 타의든 채우곤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 시간이 아무것도 안 하는 잉여 시간이나 유휴 시간이 아니었더라. 컨디션을 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확보해두어야 하는 완충 에어 포켓과도 같았다.
20-30%의 시간을 비워두는 것을 아까워하거나, 다른 무언가로 채워도 괜찮은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적극적인 포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여유분을 두고 한동안 살아보고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다.
오늘 낭독회를 열지 않아서 하루종일 일정이 없었던 나는 그래서 무얼 했나?
세상 한량 같이 보냈다.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서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은 만큼 뒹굴거리며 책도 보고 글도 썼다.
집에서 꼼지락대며 밥을 먹고, 씻지도 않고 화장도 안 하고 잠옷을 입고 저녁 때까지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ㅎㅎ
사이드 프로젝트 준비에 필요한 문서 작업을 했고 이 모든 일을 하는 내내 거의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밥도 침대에서 먹음 ㅋㅋㅋ 이불 속이 제일 좋아..)
평소의 나였다면 스스로를 매우 한심히 여기고 오늘 하루를 아깝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도 살짝 그런 마음이 올라왔다. ‘이렇게 보내도 되나..? 벌써 3시인데..?’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오늘 오전에는 조금만 쉬다가 문서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사이드 프로젝트 준비를 위해 부동산에 매물을 보러 간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는데..
막상 일어나보니 몸이 이불을 떠나기 싫어했다. ㅋㅋ 그래서 또 과감히 포기했다.
직장인이라 부동산에 갈 수 있는 시간은 1주일에 딱 하루 토요일밖에 없는데 (일요일은 부동산이 문을 닫는 것이 아쉽다 ㅠㅠ) 그 황금 같은 하루를 날린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사이드 프로젝트 마감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만의 프로젝트인데 이번주에 못 가면 다음주에 가면 되고, 다음주에 못 가면, 음 그건 좀 용납이 안 되지만, 뭐 그래도 못 간다면 그 때는 또 그 때의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겠지.ㅎㅎ
오늘 부동산은 못 갔지만 대신 원하는 매물을 더 꼼꼼하게 정리했고, 부사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준비도 더 많이 해두었다.
무작정 가서 발품을 파는 것보다 시간을 들여 더 준비해서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그냥 가기 귀찮아서 자기 합리화 하는 거 아니냐’ 라고 자기 객관화 시간을 가져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래 계획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부동산에 나서는 것보다는 준비 과정을 거친 후에 가는 것이 맞았다. (물론, 그 준비를 오늘이 아니라 이번주 평일에 미리 해뒀어야 하는 건 맞다..^^ 그랬다면 오늘 바로 갈 수 있었겠지. 그건 내가 잘못한 부분이 맞음.)
그동안 정해둔 계획을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를 많이 자책했는데 사실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미뤄진다고 해서 꼭 문제될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뭔가 나에게 페널티가 없는 일일수록 미루고 싶은 마음이 클 거라고 생각해서, 한 번 봐주면 한도 끝도 없이 미룰 거라며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세웠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자기 관리를 잘 하는 걸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것이었다. 나의 의지력을 못 믿으니까 유연성을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정해진 날, 시간에 ‘했냐 안 했냐’만 보면서 잘 했냐 못 했냐를 체크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루틴과 계획을 지켜야 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나를 좀 더 믿고 스스로에게 덜 가혹하고 유연성을 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포기의 유용함과 긍정적인 면을 깨닫게 되었으니, 아직도 포기하는 게 매번 힘들고 쉽지 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포기를 잘 하게 된 것 같다.
‘생각 없는 계획 지키기’ 보다 ‘현명한 포기’를 적기, 적소에 잘 하는 2, 3월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