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초 Aug 27. 2023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이유는 우울증 때문이었다





8월 21일 정신과 첫 내원

8월 22일 다른 정신과 내원


하루 만에 다른 병원을 찾은 이유는, 내 이야기를 2분도 하지 않았는데 3주 치의 약을 지어준 심드렁한 의사 때문이다. 그 의사가 준 약을 먹고 증상이 완화될 수는 있겠지만 나는 내가 왜 이런지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었다. 대단한 30분짜리 심리 상담이 아니어도 좋으니 단 5분이라도 내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들어준 뒤에 약을 주는 의사를 만나고 싶었다. 만약 첫 의사와 똑같은 약을 처방해 준다고 해도 말이다.


마침 8시까지 야간 진료를 하는 날이었다. 정신과 진료는 다른 병원 보다도 더 대기가 길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에 전화를 걸자마자 말했다. "초진인데 진료 볼 수 있나요? 오래 기다려도 상관없어요." 그럼 오시라는 친절한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 정신과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알아본 병원들 중 한 곳이었다. 하필 내가 숨이 안 쉬어질 때 여름휴가 중이었던 병원.


좁은 대기실엔 나보다 먼저 온 여덟 명의 환자가 있었다. 나는 직원을 통해 문진표 파일을 받았다. 앞뒤로 빽빽한 질문이 적힌 A4용지 네 장이었다.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썼지만 도무지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공란으로 둔 것도 있었다. '참다운 친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나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도무지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울 정도를 체크하는 표는 거의 '매우 그렇다, 자주 그렇다'에 동그라미를 쳤다. 집중력에 관한 질문에만 '전혀 그렇지 않다'에 동그라미.


40분의 대기 끝에 만난 의사는 굉장히 친절하고 다정했다. 선생님도 나도 마스크를 끼고 있어 서로의 눈만 드러나 있었지만 마스크 아래 선생님의 얼굴이 왠지 그려졌다. 선생님도 그랬으려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문제에 대해 말했다. 감정 조절에 서툴고, 너무 예민하고, 사람들과 말을 섞기 싫고,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이 자꾸 거칠어지고, 짜증이 많다. 직장에서 나랑 같이 일을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선생님은 내가 말하는 동안 내 눈을 보시고, 중간에 잠시 파일을 뒤적였다. "지금 우울 점수가 너무 높아요. 이렇게 우울하면 사람이 감정 조절을 할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 털어 버리는 일을 전혀 털지 못해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생님은 잠시 내 눈을 쳐다보다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뇌의 어떤 부분을 설명해 줬는데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호르몬인지 뭔지가 만들어져야 되는데 그게 고장 났으니 약으로 억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어떤 사람은 그 부분이 약하게 태어나기도 한다고. 나는 선생님의 다정한 목소리에 취해 그냥 눈물이나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 시작부터 책상 끝에 올려둔, 어제 다른 병원에서 받아 온 약봉지를 선생님이 두 번 정도 힐끗 쳐다봤다. 그 약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니 선생님은 약봉지를 가져가서 살펴보셨다. "가슴이 두근거릴 때 먹는 약은 갖고 다니면서 비상시에 드셔도 좋고, 다른 하나는 먹지 맙시다." 난 새로운 약을 처방받았다. 휴가 바로 다음 날이라 진료가 밀려 더 길게 상담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다음번에 더 자세히 얘기하자고 하셨고 나는 실제로 내 증상에 반 정도만 말했을 뿐이다. 다음 주로 진료 예약을 잡고 나는 병원을 나왔다.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전혀 내리지 않아 우산이 짐이 됐다. 그래도 마음은 가벼웠다.


저녁 식사 후 먹는 폭세틴캡슐 10mg, 자나팜정 0.125mg, 가스몬정(위장약) 그리고 취침 30분 전에 먹는 조피스타정 1mg, 알프람정 0.25mg. 이것들의 부작용을 검색하느라 거의 밤을 새웠다. 의사 선생님이 이러라고 약을 준 게 아닐 텐데. 난 우울감 못지않게 불안감도 상당히 높은 사람이었나 보다. 걱정이 많다고는 여겼지만 불안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공황장애 및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서 내가 '그런 사람'같다고 한다. 그들이 의사는 아니지만, 다음 진료 때 선생님께 무서워서 약을 잘 못 먹겠더라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식후 약은 괜찮은데 취침 30분 전에 먹으라는 약이 나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다음날 못 일어나면 어쩌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 지각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거의 확신처럼 들었다. 결국 첫날은 취침 약을 먹지 않았다. 다음 진료 때 내가 먹는 약의 종류가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