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살나기 직전, 멸종위기인 나의 인류애

퇴근길 신나는 플리로 인류애 걱정까지 하는 오지랖

by 딥핑소스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대

내일이면 인류가 잃어버릴 멸종위기사랑~♫”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이찬혁의 '멸종위기사랑'을 틀었다.

처음 이 노래를 알게 된 건 인스타그램의 릴스 때문이었다.


<더 시즌즈> 방송 무대에서 이찬혁이 이 노래로 퍼포먼스를 하는 영상이었는데, 보자마자 마이클 잭슨과 브루노 마스가 겹쳐 보였다. 세상 힙한 무대다 싶어서 그날부터 그 음악을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리듬, 어깨가 먼저 아는 그루브. 나는 그냥 신나는 퇴근길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루 종일 일보다 사람 상대하는 게 더 지쳐서 겨우 앉은자리였는데, 이 정도면 그냥 신나도 되는 거잖아!




아니 근데 이게 웬걸,

나는 사랑이 아니라 갑자기 인류애가 떠올랐다.


나도 내가 좀 웃겼다. 이렇게 신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 인간에 대한 신뢰를 걱정하고 있다니. 그것도 퇴근길에? 사람에게 치여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이.


노래 제목이 '멸종위기사랑'이라서 처음에는 연애 얘기겠거니 했다. 근데 이상하게 자꾸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호의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사랑보다 그 사랑이 자라날 바닥이나 근본 같은 것. 인류애가 사랑보다 먼저 더 빨리 희귀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을 대하는 순서가 나도 모르는 새 바뀌었다. 예전에는 호의가 먼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면 경계가 먼저 온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내 시간을 앗아가고 있었고, 믿었던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보존을 먼저 택했다.


그러고 보면 드라마틱한 배신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하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눈치채기도 애매한 속도였을 뿐. 그렇게 관계가 닳다 보면 인류애도 슬슬 멸종위기종이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


관계는 점점 더 빠르게 소비되고, 친절은 전략이 되고, 신뢰는 리스크가 된다.


우리가 처음 배웠던 인간에 대한 호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뒤통수 맞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근데 그 경계가 너무 촘촘해지다 보니, 사람을 좋아하면서 얻는 기쁨도 같이 차단되어 버린 것 같다.


사랑이 멸종위기가 된 게 아니라, 사랑이 자라날 토양이 먼저 메말라버린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탓해야 하냐고 한다면-

글쎄, 일단 알고리즘에게 화살을 좀 돌리고 싶다.

나의 퇴근길에 이걸 추천해 준 건 알고리즘 녀석이잖아...!


그래도 완전히 비관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관계에서 닳아본 사람만이 아직 남아있는 걸 더 선명하게 알아보는 법이니까.


계산 없이 건네는 친절.

기대 없이 좋아해 주는 마음.

그렇게 드물어서 더 선명한 것들.


멸종위기종이 사라진 건 아니잖아.

그냥 드물어진 거지.


'사랑은 무슨 얼어죽을, 멸종위기의 인류애면 모를까'


지하철이 역에 멈췄다.

나는 볼륨을 높이고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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