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보다 먼저 잘라내고 싶었던 것들
“진짜 자르실 거예요? 이만큼요?
묶어서 한 번에 잘라도 돼요?”
실장님이 서너 번은 물었다.
나는 그때마다 “네” 하고 대답했다.
약간은 쿨한 사람처럼.
그런데 사실 속으로는 나도 좀 웃겼다. 아니, 머리 한 번 자르는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비장해야하는건가 싶어서.
허리까지 오던 머리를 질끈 묶고, 실장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을 때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서걱..서걱..
생각보다 미련은 없었다.
대신 묘했다.
오래 기른 머리카락이 한 번에 잘려나가는 걸 보고 있으니, 진짜 몸무게가 300그램쯤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지난 시간이 같이 툭 잘려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눈물이 차올랐다.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냥 왔다.
몇 년째 내 머리를 해주신 실장님 앞이라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살짝 눈을 비비는 척도 했다.
‘그냥 머리를 자르는데 왜 눈물이 나지...‘
스물다섯이었다.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졌고, 나는 상황을 듣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 네 가족은 58평 방 4개짜리 아파트에서 22평 방 2개짜리 월세로 이사했다.
취업을 했다.
내가 정말 원했던 일이라기보다는, 그때의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15년 동안 해왔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접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붙잡으면서. 잘려나간 건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안에 내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도 같이 떨어진 것 같았다.
무릎 위 케이프 위로, 한 번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포기한 건 하나의 진로나 생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때,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붙들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먼저 놓았는지도 모른다. 한 번 접어둔 마음은 그다음부터 조금 달라졌던 것 같다.
마음이 가는 것이 있어도 일단 되는 쪽부터 먼저 생각했다. 원한다고 말하기 전에 안 되는 이유를 먼저 떠올렸다. 머리를 자르고 거울을 봤을 때, 조금 오래전의 나를 본 것 같았다. 그게 결코 얼굴이 어려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때의 분위기 같은 것...
아직 덜 영글었지만,
치기 있었고,
하고 싶은 게 많아 꿈도 많았고,
괜히 혼자 뜨겁던 젊은 날의 나.
단발머리를 한 내 얼굴을 보는데 그 시절의 내가 잠깐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 돌아왔다기보다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구나 싶은 기분.
사실 너무 짧게 자르지 않은 건 운동할 때 묶어야 해서였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피식 웃었다.
15년치 무게를 정리하면서도 운동할 때 머리는 묶을 수 있어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니.. 아마 나는 이런 식으로 오래 살아온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많았고, 미용실 문을 나서는 순간 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며 드러난 목덜미에 스치는 바람이 낯설 만큼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