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좀비 편
안녕하세요, 깊이있는 찍먹을 위한 영화 소스 디핑입니다.
이번에 전해드릴 디핑 소스는 영화 <부산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디핑 팀은 막상 영화 얘기보다는 영화를 핑계로 그 내막에 있는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를 푸는 것을 좋아해서요. 이번 소스도 스포 없이, 영화 얘기인듯 아닌듯, 이상하고 알차게 준비했습니다.
주객전도 디핑 소스의 주 재료는 <부산행> 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것! 좀비입니다. 영화의 흥행 이면에 있는 좀비물의 인기 비결에 대해서, 사회적인 시각으로 찍먹해 봤어요.
좀비물 장르의 인기 비결?
<기생충>과 <킹덤> 이전에 해외 영화계가 주목했던 우리나라 장르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소스 주재료인 2016년 작 영화, <부산행>입니다.
<부산행>의 글로벌 흥행
좀비물 장르의 형성
좀비물 장르의 인기 비결?
<부산행>의 해외 실적, 의외로 괜찮았단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1억 달러 이상의 글로벌 흥행 수익을 거둔 한국 영화 가운데 무려 2위를 기록하고 있답니다. 짐작하시는 대로 1위는 <기생충>. 의외로 3위는 <극한직업>이 차지했대요.
숫자 얘길 많이 하면 지루하지만, 흥미로운 TMI가 있어서 알려드려요.
<부산행>은 해외 박스오피스 매출만으로 4500만 달러(약 505억 원)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어요. 이는 개봉 당시(2016년) 기준으로 약 10여년 만에 갱신된 한국 영화의 해외 흥행 기록인데요. 그동안 긴 시간 흥행 수익 1위를 지켜온 작품은, 뜻밖에도 2005년 작인 멜로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였다고 합니다(약 356억 원). 저만 놀랐나요...
우리나라에서도 천만 관객 동원에 성공하며 장르물 영화로선 흔치 않게 히트했지만, 흥행 외 작품성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국내 영화계에서는 갑툭튀한 신파극 전개, 배우들의 연기력 및 감독의 연출력 논란 등으로 호불호가 다소 갈렸었지요. 반면 해외에서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요. 미국 커뮤니티 레딧에서는 여전히 한국 영화나 소규모 장르 블록버스터 영화를 추천하는 스레드에 종종 <부산행>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특히 드넓은 벌판에서 유혈이 낭자하고 총기가 난사하는 미국형 좀비 영화와 달리,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거친 무기가 등장하지 못하는 설정과&기차와 기차역을 주된 배경으로 전개되는 한정된 장소 세팅 등에서 신선함을 느꼈다는 평이 많습니다.
디핑이 의외로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하는데? 싶으셨다면 정답입니다. 이제부터 다른 얘기를 꺼낼거라서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부산행>이 기대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신선함도 신선함이지만, 결국은 기존의 좀비물 장르를 잘 취사선택하여 맺어낸 영화였기 때문일텐데요.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있어요. 좀비가 뭐고, 어떻게 만들어진 건데?
✔ 좀비물 장르의 형성
좀비의 개념은 죽은 자를 부활시켜 노예로 삼는다는 아이티 섬 부두교 전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주술로 움직이는 시체라고 보면 되는데요. 인간의 모습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몸이 반 이상 썩어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로 그려집니다.
영화계에서는 현재의 개념에 가까운 좀비의 모습을 최초로 구현해 낸 영상물로 1968년 만들어진 공포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꼽습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 사람들을 물거나 공격하고, 전파된 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괴물로 변한다는 좀비물의 토대 설정을 만든 영화인데요.
이처럼 좀비물은 의외로 태어난지 50년이 조금 더 된 비교적 신생 장르예요. 흔히 괴물, 혹은 공포영화의 소재로 떠올릴 수 있는 생명체로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동양권의 귀신 정도가 있죠. 좀비는 이 선배들에 비하면 연차가 훨씬 짧아요. 때문에 창작자들은 크리처(creature)로서 좀비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서사를 부여하는 데에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고, 대중의 시각 또한 보다 열려있어서 다양한 재해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냥 징그러운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는 거죠.
✔ 좀비물 장르를 일으킨 작품들
좀비는 2000년대 초반부터 여러 작품들에 등장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는데요.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는 세련된 영상미와 연출이 돋보이는 액션 수작 <레지던트 이블>, 기괴할 정도로 빠르게 뛰어다니는 좀비의 공식을 생성한 <28일 후>가 꼽힙니다. 걸신들린 듯 사람의 신체를 뜯어먹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든지 하는 지나친 고어 연출을 지양하고, 얼룩진 피부와 뒤틀린 이목구비, 각기춤을 연상케 하는 동작 등 살아있는 인간과 확연히 구분되는 만화적인 특징들을 부여해서 불쾌한 골짜기*효과를 줄이고자 했죠. 이렇듯 보다 섬세한 묘사를 통해, B급 문화에서나 등장하던 기괴한 괴물이 → 대중적인 취향의 범주로 상륙하기 시작했어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효과란?
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의 외양이 실제 사람과 닮을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강한 거부감으로 바뀌는 현상
좀 더 최근의 예를 볼까요. 좀비물! 하면 바로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죠? 미드<워킹 데드> 입니다. 2010년대 전 세계적인 좀비물 열풍의 출발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에요. 브래드 피트와 할리우드의 대형 자본을 만나 대규모 '좀비 블록버스터'의 시초를 연 영화 <월드워 Z> 또한 그에 뒤이어 대중적으로 큰 흥행을 거뒀습니다. 위 두 작품의 대성공 이후 비로소! 미국 영화계 뿐 아닌 전 세계가 좀비라는 장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소소하게 출발한 <부산행> 열차도 탄생했지요.
유리문을 부수고, 기차에 주렁주렁 매달리는 등... <부산행> 속 기차역을 무대로 좀비 떼가 물밀듯 쏟아지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요. <월드워 Z>에서의 연출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그렇다면... 좀비가 이렇도록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왜일까요? 디핑은 사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어라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요. 할리우드의 박스오피스 구성이 대형 장르 영화나 블록버스터급 영화 위주로 편중되고 있는 시장 논리를 꼽아볼 수도 있고요. 콘텐츠 소비가 모바일화되면서 짧은 호흡으로 눈길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인 요소가 중요해진 탓도 있을 겁니다. 비슷한 논조의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미 했으니 오늘 디핑 소스에서는 좀더 새로운 맛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삶과 위기,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종말의 메타포, 아포칼립스Apocalypse
종말과 재앙의 서사는 꾸준히 대중의 본능을 자극해 온 장르입니다. 그 장르를 일컫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란 그리스어로 '계시'를 뜻하는 말이에요. 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은 메시아 예수의 재림과 인류의 종말, 그 이후 도래할 구원에 대하여 선언하지요. 아포칼립스물은 바로 그 미래를 그립니다.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묘사되는 종말의 원인은 작품 당시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합니다. 냉전 시대 직후에는 핵전쟁을 둘러싼 테러리즘 서사가 유행했고요(<터미네이터>, <매드 맥스> 시리즈). 그 이후 지구온난화로 인한 천재지변이 주를 이루었다가(<워터 월드>, <투모로우>, <설국열차>), 전통적 인기 장르였던 외계 SF물과 섞이며 범 우주적 재난으로까지(<엣지 오브 투모로우>, <오블리비언>) 관심사가 확대되었습니다. 과거 개봉했던 전염병 유행을 다룬 영화들도 최근 다시 관심을 받고 있어요(<둠스데이: 지구 최후의 날>, <메이즈 러너> 시리즈, <컨테이젼>).
이쯤 되면 종말을 맞이하고 대비하는 이야기는 거의 다 봤다 싶은데요. 그래서, 일단 살아있는 인간의 일부를(?) 망하게 하고 시작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등장이자, 그 대표 인기주자인 좀비물이 출범하는 포인트입니다.
✔ 결국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스몸비(스마트폰 좀비)'라는 용어가 있죠. 줄곧 손에 든 휴대폰을 향해 시선을 내리깐 채로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걷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에요. 이처럼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의식과 배려 없이 무미건조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을 두고 '좀비 같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좀비는 단순히 인간의 공상으로 만들어진 영화 속 크리처에 머물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의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경향들이 투영되는, 사회적인 상징에 가까워졌지요.
따라서 미디어가 좀비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달라졌습니다. 초기의 좀비 영화들이 무차별적인 인간 공격과 감염, 그로인한 종말에 대한 원시적 공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최근의 좀비물은 그 사이 발생하는 관계에 보다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요. 좀비가 초래한 종말의 과정 속,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적 공포를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규모로만 승부하는 단순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부산행>, <워킹데드>, <킹덤> 시리즈와 같이 주변인들과 사회 일부가 좀비화하면서 생기는 변화와 갈등, 그로 인한 인간 군상을 그리는 작품들이 주가 되고 있습니다. 디핑 스타일로 표현하자면: 좀비는 핑계고, 사실은 다른 걸 말하겠다예요. 하지만 공통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반영합니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통해 인간 군상을 그리다: <부산행> 연상호 감독 인터뷰 보러가기
국가와 세계 차원에서 좀 더 거시적으로 형성되는 관계와 충돌들은 우리에게 더욱 충격적인 공포를 내재하게 만들었어요. 미국 얘기부터 풀어보면요. 대내적으로는 경제 불황과 실업 문제, 갈수록 고조되어 폭동에 이르고 있는 있는 인종 및 젠더 갈등 문제가 사회적 불안과 혼돈을 야기해 왔습니다. 대외적으로 역시 2000년대의 탈레반, 2010년대의 IS 등 테러리즘 집단들과의 대립과 실제적인 무력 충돌이 있어왔고요. 특히,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미국 내 사회적 공포심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서 2001년 9.11 테러를 지목하는데요. 우리나라의 경우 그 분기점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침몰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몇번의 안타까운 사고(혹은 사건)들을 겪으며 국민성이라고 할까요, 작게는 소화전이 울렸을 때 대피하는 속도에서부터, 더 크고 깊게는 사회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표현해내는 방식까지 여러 차원에서의 변화가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이러한 일들을 목격해 온 시기에 따라서 얼만큼 민감하게 반응하고 영향받는가 또한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유행하는 세대론이 발생하기도 한 것 아닐까요? (그 적부합 여부는 차치하고서요 )
작금의 분열과 미래의 종말. 드러나는 현상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결과보다 그 원인이 우리의 삶에 산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이상 현상들은 결국 한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공포의 공기들이 마치 하나의 먹구름 형태처럼 모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디핑 소스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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