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다양한 자리에서의 각기 다른 모습이 있고, 그중에 어떤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정체성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 여러 모습 중에서 나를 가장 많이 지배하는 내 모습은 ‘해내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이다.
조금 슬픈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온 가장 큰 힘이 이 성취감이라는 녀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있다, 또는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배우고 있다, 채워지고 있다, 멋져지고 있다, 똑똑해지고 있다…는 (자의적) 해석. 약간 나 자신을 가지고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게임 속 캐릭터처럼, 키워. 키워내.
그 결과 수노의 지적대로 나는 실패나 실수에 면역이 별로 없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나 자신과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아주 못된 인간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누구보다도 강한 인정욕구가 더해져, 나는 누군가는 혀를 내두르는 일중독자가 된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며칠 전 고래 꿈을 꾼 뒤로 나는 우당탕탕하는 음악을 틀고 나 자신에게 가장 흡족한 핏의 옷과 향을 입히면서 스스로와 문답을 한다. 결론도 못 내면서.
1. 일은 나에게 경제적 이득 외 다른 이득 - 즉 자아실현의 기회나 내면성장 - 을 가져다주는가?
1-1. 당연하지. 그럼 나는 일을 계속해야만 성장하는 걸까?
1-2. 아니지. 어떤 인생이든 꼭 직업으로서의 일을 안 해도 성장은 하겠지.
1-3. 그런가? 그럼 모든 사람은 죽는 순간 가장 내적으로 성숙하고 나은 인간이야?
1-4. 아니지. 그럼 세상이 이 모양이겠어?
1-5. 그럼 내가 이런 성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건 어리석은 거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할머니가 되어서 죽으면 행복한 건가? 어떤 지점에선 10대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나아. (예시 : 미적분을 좋아하고 그 풀이과정에서 철학적인 사고를 이끌어낸다. 현재의 나는 미적분 까막눈)
1-6. 사람을 가르쳐서 더 나은, 즉 돈을 잘 버는 인재로 만드는 데 한계란 없다는 사고는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가 가진…어쩌구… 한국인이 너무 좋아하는 명품은 그걸 설명 없이 보여주는 효율적인 저쩌구…
1-7. (말 돌림) 그럼 이렇게 정리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에 누적되는 추가적인 정체성을 사랑하겠노라.
1-8. 일단은.
2. 적게 일하고 차라리 조금 벌겠다는 저성장 시대의 어떤 인력들은 일 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 개인적 성장을 성취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예를 들어 취미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2-1. 애초에 성장에 관심이 없을 수도? 너도 그러면 되잖아?
2-2. 싫어. 나에겐 야심이 있잖아.
2-3. 그런가? 일단 야심과 성장이 관계가 있어? 그리고 그게 아니라 그냥 그때그때 뭔가를 만든다는 기분이 좋은 거 아니야?
2-4.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겠다며. 그게 야심 아니냐. 왜 소소한 척해.
2-5. 여성(나 자신 포함)에게 소소하지 않은 야심을 허한다.
2-6. 일 중독이든 아니든 일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지금껏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낸 것 중 대부분을 몰랐을 것이다. (결론 안 남)
헛소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