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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스마의 섬에 도착하다 Ⅱ

환상으로 가득 찬 아비스마의 섬, 끝내 그곳을 빠져나오다

by 희야



- 저 물고기, 바로 너야.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걸 선물할게. 나랑 같이 이 샘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래?




01

샘물 속, 찬란한 빛 사이로 파란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그녀가 야광 빛을 내는 큰 잎사귀 위에 두 팔을 얹고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누군가의 꿈이 깃든 그녀의 눈동자 속에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두렵니? 이 안에 네가 원하는 게 존재하지 않을까 봐? 또다시 혼자가 될까 봐? 풉.

그런 걱정은 필요도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는 그녀. 나를 향해 방긋- 하고 웃어 보이고는, 이따금 다시 샘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만다. 두려웠던 걸까. 나의 마지막 꿈을 품고 있는 그녀가 사라지게 될까 봐. 나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 샘물 안으로 몸을 푹 담갔다.


먹먹하다. 샘물 속, 이곳의 공기는 묵직했고, 그 안에서 나의 몸은 마치 이질적인 세계에 들어선 듯 느리게 가라앉고 있었다. 내 몸과 샘물의 물이 맞닿은 순간, 비현실적인 감각이 온몸으로 번져들어왔다. 제각기 다른 빛을 내뿜는 생명체들이 곳곳에 붕- 뜬 채로 고이 잠들어 있다.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이들이 모여 이룬 광경은, 마치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백 개의 별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그녀가 지나간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곱고 푸른 머리칼에 한 번도 해를 보지 않은 것처럼 새하얀 피부, 그녀의 하체를 둘러싸고 파란 빛깔을 풍기는 비늘. 그런 몸을 나풀나풀 흔들며 허공에 떠다니는 그녀. 물결이 일듯 굽이굽이 부드럽게 헤엄치는 그녀의 몸짓에, 내 몸과 마음도 스르르 풀어진다. 넋이 나가버린 나의 동공은 뿌옇게 흐려졌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마저 모호해졌다.


그래. 그까짓 현실, 그게 뭐가 중요해. 이렇게 아름다운데.
내가 이곳에 살겠다고 하면, 여기가 진짜인 거야.

어느새 샘물 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별빛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것들이 하나씩 내 몸에 달라붙는다. 저기 고이 잠든 이들처럼, 내 몸도 빛더미에 둘러싸이며, 서서히 굳어져 간다.




02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희한한 섬, 깜깜한 샘물 속을 밝히는 무수히 많은 별빛, 그리고 황홀한 아비스마의 춤사위. 이곳에 잠들어 있는 생명체들은 행복한 걸까. 그들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지어지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그 어떤 물결의 동요도 일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 주변엔 작은 빛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이 모여서 그들을 빛나게 했다. 그 빛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물일 뿐인데 이곳은 왜 이리도 먹먹하게 느껴지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막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샘물은 섬 안에 고여있다. 흐르지 않는 물이다. 외부의 것이 흘러들어올 수도, 내부의 물이 흘러 나갈 수도 없는 곳.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의 환상으로 가득 찬 섬. 샘물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걸까, 죽어가고 있는 걸까.


섬 안의 샘물에 고여있는 물고기들. 어떤 물고기는 불행한 현실에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행복한 환상 속을 택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차라리 그곳이 나았다. 도무지 앞으로 나타날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장애물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물고기는 이곳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고 떠나갔다. 하지만 또다시 이곳을 되찾게 되었다. 만족할 수 없었다.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소망하게 되었고, 원하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이 생겨났다. 점점 더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자신의 손안에 가둬두려 했다. 그러한 물고기들은 아비스마의 섬을 찾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영영 아비스마의 섬에서 머물러야 했다. 아비스마의 환상의 샘물, 그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몰라. 지금 내 삶은 불행한걸. 행복한 환상, 불행한 현실. 어느 걸 택해야 할까. 글쎄, 그건 각자의 몫이겠지. 어쩌면 두 가지 다 우리의 삶일지도.



근데, 난 싫어. 이대로 영영 잠들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자,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샘물 아래에 큰 구멍이 뚫렸다. 나는 무언가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밑으로 쑥 빨려 내려왔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비스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다. 얼음장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한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는 너를 위로해 줄 달콤한 환상 따위는 없을 거라는 듯, 무너져버린 샘물처럼 너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는 듯. 네 앞에는 차갑고 냉혹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그녀의 눈빛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몸에 힘을 꽉 주는 것도, 이제는 지쳐.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아.
또 어떤 파도를 마주하게 될지, 그 생각만 해도 힘겨워.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그 아픔이 너무나 두려워.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그런 걱정들보다 안도감이 먼저 떠오른다. 내 몸은 가라앉고 있지만, 내 마음은 투명한 공기 방울들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03

한낮의 꿈결 같던 환상의 섬.

아름답고도 섬뜩한 아비스마의 유혹.

나는 끝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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