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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이 가라앉는다.

몸에 힘을 풀고, 저 아래로 내려가 본다

by 희야





근데, 난 싫어. 이대로 영영 잠들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자,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샘물 아래에 큰 구멍이 뚫렸다. 아비스마와 눈이 마주쳤다. 얼음장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한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는 너를 위로해 줄 달콤한 환상 따위는 없을 거라는 듯, 네 앞에는 차갑고 냉혹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그녀의 눈빛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그런 걱정들보다, 안도감이 먼저 떠오른다. 내 몸은 가라앉고 있지만, 내 마음은 투명한 공기 방울들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낮의 꿈결 같던 환상의 섬.
아름답고도 섬뜩한 아비스마의 유혹.
나는 끝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01

깊이, 더 깊이.

내 몸은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다.

어디까지 내려가는 걸까.

그래, 한번 내려가보자.

저 바닥 끝까지.

얼마나 깊은 곳인지, 가보기나 하자.

그토록 두려웠던 곳으로.


천천히, 몸에 힘을 풀어본다.

영혼이 묶여있지 않은 이처럼,

몸을 축 늘어트려 본다.

그러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본다.

온몸에 힘을 꽉 줘도

앞으로 전진하는 일은 그리도 고단하더니,

살짝만 힘을 풀어도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참으로 쉽구나.

그렇게 나는,

깊은 물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깜깜하다.

몸이 가라앉는 동안,

나는 깊은 어둠을 지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눈을 감아도, 떠 보아도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

그래서 눈을 감는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아주 편안히.

스르르-



02

늘 그랬다. 몸에 힘을 꽉 주지 않으면,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물이라는 건, 모든 걸 뒤덮고 남을 만큼 무거운 중압감을 가지고도, 뚜렷한 형태가 없어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게 했다. 그런 물속에 영영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그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어떤 거대한 물보라가 나를 덮쳐와 숨이 막히도록 짓눌러댈지, 또 어떤 물고기가 내 연약한 피부를 뚫고 들어와 한없이 여린 가슴에 생채기를 낼는지. 알 수 없는 내일이 온다는 것. 머릿속 한켠에 생겨버린 내일이라는 텅 빈 공간으로, 걱정과 부정이 손을 맞잡고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내가, 두려운 내일을 만들어갔다. 내가 만든 무거운 중압감으로 내 몸을 짓누르는 것, 그것이 나를 위해 했던 일이었다.


아비스마의 섬이 무너져 내리며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땅과 물보라가 산산조각 날 때, 그 온갖 조각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내게 말하는 듯했다. 이래도 힘을 풀지 않겠냐며, 위협적인 기세로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매일 벼랑 끝에 매달려 있었는걸. 그래서인지, 이런 상황이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어차피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으니, 이제는 될 대로 돼 버려라. 다 포기할게. 꿈도 희망도 없는 곳으로, 저 밑바닥으로 내려갈게. 그런 생각으로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바닷물에 내 몸을 맡겼다. 자,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 마음껏 망가트려봐라.



03

어디쯤일까. 짙은 어둠으로 인해, 이 깊은 공간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무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도, 왠지 두렵지가 않다.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공간에 던져졌는데, 겁에 질려 벌벌 떨지 않는 건 참 오랜만이다. 이상하게도,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숨이 멎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의 옅은 숨결이 물길 사이를 지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저 위에서 거칠었던 호흡 역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그토록 두려웠던 바다가 내 몸을 차분히 감싸 안아준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편안한 상태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가라앉던 끝에,

마침내 해저에 다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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