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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살이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빛이 되었다

by 희야




설령 불완전한 존재라 해도, 분명히 있다.
나만의 길, 나의 터전이 될 그곳.
불완전한 것이 완전함이 되고,
완전한 것이 불완전함이 되는 곳.

어쩌면, 완벽과 결핍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은,
서로에게 빛과 그림 자가 되어 줄 테니.

그리고 마침내 해저까지 도달했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곳에는, 나와 비슷한 생명체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01

해저로 내려온 지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이곳의 느릿한 감각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이곳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대신, 푸른 반딧불이들이 어둠을 물들인다. 그 빛은 오래된 기억처럼, 내 몸에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그것을 머금은 내 몸은, 스스로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떠한 도움도 없이, 오롯이 나 홀로 어둠을 밝힐 수 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나는 빛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은 아무런 이유 없이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럴 때면 산책을 나선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다. 천천히, 떠도는 조류를 따라 무심히 떠다닌다. 그렇게 마주한 풍경은 낯설고도 생경했다. 암흑 속에 가려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던 심해에도, 나름 다양한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텅- 비어 보이던 공간이, 이제는 가득 차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까만 심해의 균열 같은 바위틈, 그 속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작은 생명들. 미약한 숨결, 희미한 진동. 그것들을 비추는 건,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몸과 마음의 허기짐이 느껴질 때쯤, 나는 먹이를 찾으러 나간다. 물고기를 사냥하기에 나의 이빨은 너무 무디고, 내 마음은 그보다 더 연약하다. 그런 나를 지탱하는 건 해초뿐이다. 그러나 이 깊은 곳에는 그것조차 드물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허기가 찾아올 때만 움직인다. 신기한 일이다. 이곳에 내려온 이후, 위에서 느꼈던 허기, 그 허무와도 같은 공복감이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헛헛함은, 먹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몸은 땡땡이 부풀어 있다. 저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축 늘어지던 몸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나는 들었다.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수압에 의해 몸이 터져버릴 거라고. 틀렸다. 내 몸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다. 마치 쪼그라든 공기주머니에 숨결을 불어넣은 듯, 무언가가 내 몸을 가득 채워 주었다. 이곳의 압력은 나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물고기에겐 포악했을지라도, 나에겐 아니었다.

위의 것들은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고, 아래의 것들은 위에서 숨 쉴 수 없었다. 나는 이제, 그 경계 어딘가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 나는 강한 압력에 버티는 몸을 가졌다. 어쩌면, 나는 강인한 존재인 걸까. 위에서도 버텨냈고, 아래에서도 살아남았으니.



02

모든 것이 잠든 듯한 적막, 그 고요의 수면 위로 갑자기 '쿵-쿵-'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파문처럼 퍼졌다. 찢긴 적막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그 원인을 마주했다.


바닥 위, 하얀 가시만 남은 물고기 하나가 바닥에 머리를 들이박고 있다. 오래된 습관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피부도, 비늘도 없이 뼈가 그대로 드러난 날것의 몸 위로 차가운 물결이 스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이빨이었다. 날카롭고도 뾰족뾰족한 그것. 그리고, 그의 안구가 들어차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그는 눈동자가 없었다. 그래서 미쳐버린 게 아닐까 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뾰족이 물고기가 연신 머리를 들이받던 곳 옆에는, 조그마한 진주알 조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볼 수가 없으니 정확한 위치를 알아차릴 수 없던 걸까. 또 틀렸다. 그는 아주 정교했다. 그의 행동은 의도적이었다. 그가 머리를 들이박을 때마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조개들이 톡- 하고 튀어 올랐다. 참 재밌는 친구다.


왠지, 그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다가간다. 그 순간, 뾰족이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빤히-.



03

조용한 모험을 시작했다. 지금 나는, 나조차 알지 못했던 세계의 가장 깊은 곳을 탐험하고 있다.

사실 짙은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숨겨진 본질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까매지길 택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연약하지만 찬란한 빛이 너무도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스스로 어둠 속에 몸을 숨겨버린 걸지도. 모든 것이 유영하듯 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에, 나도 천천히 스며들어가고 있다. 이 낯선 듯 편안한 공간은 어쩌면 나의 가장 안쪽, 의식 속 어느 구석에 자리한 그늘진 방 안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두렵지 않다. 이제는 안다. 아주 작은 빛이라도, 어떤 공간을 비추기에는 충분하다는 걸. 그리고 그 빛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저 깊숙한 곳. 내 안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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