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사실 짙은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숨겨진 본질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까매지길 택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연약하지만 찬란한 빛이
너무도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스스로 어둠 속에 몸을 숨겨버린 걸지도.
모든 것이 유영하듯
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에,
나도 천천히 스며들어가고 있다.
이 낯선 듯 편안한 공간은
어쩌면 나의 가장 안쪽,
의식 속 어느 구석에 자리한
그늘진 방 안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두렵지 않다.
이제는 안다.
아주 작은 빛이라도,
어떤 공간을 비추기에는 충분하다는 걸.
그리고 그 빛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저 깊숙한 곳. 내 안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01
저 위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다. 눈이 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게 반짝이던 햇빛. 그 금빛 조각들을 머금고,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뛰어오르는 거대한 생명체. 푸르른 바닷속, 투명한 물결을 가르며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은비늘의 무리들.
위의 것들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바다의 윗편에는 언제나 역동적인 파도가 몰아쳤다. 그렇게 힘차게 요동치고, 또 어딘가에 부딪쳐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져버리는.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다가, 끝내 촤르르- 쏟아지는 별처럼 흩어지듯. 파도는 늘 그런 식으로 웃고, 울었다.
이 아래, 깊은 곳에서, 나는 잠시 멈춰있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에 가까운 물장구를 치는 일도, 격렬한 파도 속에 몸을 던지는 짓도. 모두 다 멈추었다. 눈이 멀 정도로 반짝이는 빛이라도, 내게 스며들지는 못했다. 무수한 조각을 품고 아른거리는 물결도, 내게는 거대한 물보라와도 같았다. 그들은 나와 달랐다. 그래서 멀고도 아득한 신기루처럼 느껴졌던 걸지도. 황홀한 고래들의 춤사위도, 영롱한 은비늘의 몸짓도.
찬란한 별빛이 쏟아지던 수면 위, 그곳을 동경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두터운 껍질에 가려진 나의 생살, 그 본모습을. 그렇다. 바다의 윗편은 나의 서식지가 아니었다.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 그런 삶은, 내 것이 아니다.
02
이제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니, 나아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광활하고 깊숙한 바닷속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나는, 잔잔히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흘러가보려 한다. 나만의 속도를 찾아서, 고요히.
깊고 깊은 심해, 나는 지금 그곳에 있다. 까마득한 어둠, 조금의 소음도 허락하지 않는 고요함. 어떤 이에게는 두렵고 답답한 곳, 묵직한 것이 몸과 마음을 짓눌러 편히 숨쉬기 어려운 곳.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포근하고 안락한 쉼터이자, 안식처가 되어주는 공간. 그렇다. 이곳은 나의 서식지이다.
심해는 조용하다. 멈춰있는 듯, 잔잔히 흐르는 물 위로, 존재 자체로 충분한 것들이 떠 있을 뿐이다. 외부로의 질주가 아닌, 내면을 향한 무거운 침잠.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내 숨결은 더욱 짙어진다. 이곳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이곳에선 속도를 잴 척도가 없다. 경계를 나누던 지층조차도 희미해진다. 소음은 닿지 않고, 뜨겁던 것들은 이내 미지근하게 식어 내린다.
헤엄이 아닌 부유, 쟁취가 아닌 비움. 나는 여기서, 비로소 나의 속도를 허락받았다.
나는 이상한 물고기가 아니야.
그동안 나의 터전이 아닌 곳에서 살아왔던 것뿐이야. 그래서 그 무엇도 나와 맞지 않았던 거지. 엉뚱한 곳에서 발버둥 쳐오면서, 긴 시간을, 그렇게 허비해 버린 거야.
뭐, 상관없어. 그렇게 헤매다 보니, 결국 찾게 되었잖아. 그동안 나는, 나의 집을 찾기 위한 항해를 해왔던 거야.
길을 잃었어도 괜찮아.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해도, 괜찮아. 분명 있을 거야.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 나의 터전. 조금, 아니, 꽤 많이 늦어져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03
깊이, 더 깊이.
아래로 가라앉아 보아요.
빛은 점차 멀어지고,
격렬히 요동치던 물살이 잠잠해질 거예요.
당신을 끌어올리려 할지도 몰라요.
큰 파동이 일지도 몰라요.
그럴수록, 몸에 힘을 풀어 보아요.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가,
당신을 데려다 줄지도 몰라요.
저 아래,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이것은 추락이 아니에요.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바다는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몸을 맡겨야 할 그곳을.
몸에 힘을 빼고,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겨보아요.
나는, 선택했어요.
떠밀리던 삶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떠다니는 것을.
그렇게 점점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말이에요.
당신은 어떤가요.
강렬한 햇빛에, 눈을 뜨기 힘들지는 않나요.
빠르게 밀려오는 물살에,
자꾸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나를 믿어봐요.
나를 고통에 몰아넣던 것들이,
내가 가야 할 길을 깨닫게 해주기도 하니까요.
당신이 잘못된 존재로 느껴지나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이겨내지 못한 게 아니에요.
그 파도는, 당신의 것이 아니었던 거예요.
눈에 띄지 않고,
빠르게 도달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쉽게 소멸되지 않는 것.
당신은, 그런 존재일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짙은 어둠은 고요하고,
그 고요는,
당신의 심연을 감싸 안아줄 거예요.
깊은 심해 속,
나는 여기서 살아갈 거예요.
만일 당신도 가라앉게 된다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죠.
그러면, 우리 함께 이곳에서
둥-둥- 떠다녀 보아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생의 형상들이 모인 곳.
이 깊숙한 곳에서 말이에요.
깊이, 더 깊이.
아래로 가라앉아 보아요.
잔잔히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겨 보아요.
그리고 나와 함께
떠다녀 보아요.
둥-둥-
맞아요.
나는, 심해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