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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터전을 찾다

무의식이 반응하는 곳, 그곳이 곧 나의 서식지

by 희야





이상하게도,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숨이 멎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의 옅은 숨결이 물길 사이를 지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저 위에서 거칠었던 호흡 역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그토록 두려웠던 바다가, 내 몸을 차분히 감싸 안아준다.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편안한 상태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가라앉던 끝에,
마침내 해저에 다다르게 되었다.




01

밤이다. 지금 나는 밤에 잠겨있다.

밑바닥은, 모든 어둠이 잠겨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산자의 공간일까, 죽은 자의 공간일까.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결 따라 시간이 제 아무리 흘러가도, 이곳은 언제나 밤이다. 해저는 해가 뜨지 않는 곳이었다.

그때, 저 아래, 어두컴컴한 곳에서 희미한 빛 한 점이 떠오른다. 바다에 몸을 맡긴 것처럼 아주 천천히. 그것이 점점 가까워져 내 시야에 들어와도, 이렇다 할 형태가 없는 생물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특별한 생김새는 없지만, 마치 물속에 사는 반딧불이처럼 유유히, 바다의 밤을 밝혀주고 있다.


심해의 반딧불이가 내 앞에 멈춰 선다. 이렇게 작은 빛으로 암흑 속을 밝히는 자길 좀 보라는 듯, 내 눈앞에 선 채로 가만히 떠있을 뿐이다. 그렇게 몇 초정도 지났을까. 저 아래에서 또 다른 빛 두 점,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심해의 반딧불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함께 떠오르고 있다. 짙은 어둠을 가르고, 광활한 심해 속을 환한 빛으로 물들이며. 이윽고 그들이 내 눈앞까지 떠올라왔을 때, 나는 이곳에 그들과 함께 둥-둥- 떠 있게 되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힘을 뺀 몸을 축 늘어트리고. 그저 깊은 물속에 떠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머리를 비우니, 무언가 떠올랐다. 하나는 지금 내 몸이 아주 편안하다는 것. 또 하나는, 몸에 힘을 푼다고 해서 굉장히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 가라앉을 만큼 적당히 가라앉고 나면, 나에게 잘 맞는 곳에서 이렇게 둥-둥- 떠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저 아래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 어디라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비추는 환하게 비추는 빛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큰 빛더미던, 희미한 빛 한 점이던, 크기나 강렬함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지니까.



02

깊이, 더 깊이. 계속해서 가라앉다 보니, 어느새 해저까지 내려왔다. 어쩐지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내 몸은 더욱 편안해진다. 숨을 쉬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저 위에서보다는 한결 더 자연스러웠다. 잔잔히 고여있는 물 위로 물방울이 톡 떨어져 큰 파동을 일으키듯, 약간의 움직임에도 나의 몸이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나를 옥죄던 무언가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심해의 반딧불이 무리들 사이로, 희한한 생김새의 물고기 하나가 지나간다. 나처럼 온몸이 가시로 뒤덮인,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물고기. 그 뒤로 또 다른 물고기가 지나간다. 하나, 둘, 어둠에 가려졌던 생명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게다가 하나같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별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물고기.
형형색색으로 물든 피부를 가진 물고기.
콩알만 한 몸통에 달린 수십 개의 긴 촉수가 촤르르 흔들리는 물고기.
눈코입이나 지느러미도 없이, 덩그러니 둥근 몸 하나만 가지고 떠다니는 물고기….

제각기 다른 생김새를 가진 생명체들.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그들만이 가진 고유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선 무엇 하나 이상할 게 없었다. 이곳에선 나 조차도 그다지 눈에 띄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불완전한 것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곳.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문득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 일률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다시 바라본 나의 모습이 말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흐물흐물하게 축 늘어졌던 피부는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고, 투명한 피부 속을 이루던 장기들은 모두 푸른색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 몸은 바닷물보다 더욱 진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스스로 발광하고 있었다. 거짓말일지도 몰라. 눈을 꽉 감았다 떠보기도 하고, 열심히 비벼보기도 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고, 일부러 숨을 참아보기도 했다. 무슨 짓을 해봐도, 내 몸은 계속해서 빛을 내뿜고 있다. 푸르고도 푸르른, 밤하늘의 별빛처럼.


심해를 헤엄치는 방식은, 저 위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법이었다. 이곳에서는 서둘러선 안 된다. 앞을 향해 밀어붙이려 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몸에 힘을 빼야 한다. 이곳에서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저, 유유히 물속을 떠다니며 시간을 지나갈 뿐이다. 이곳은 ‘헤엄치는 곳’이 아니었다. 잔잔히 흐르는 물길에 몸을 맡긴 채, 고요히 흐르는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 그것이 심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법이며, 이 시계의 생존 방식이었다.



03

나는 물고기다.

헤엄치는 걸 잘하지 못하는 물고기. 숨이 막혀 물 위로 고개를 쑥 내빼곤 하던 물고기. 빛을 찾아다니지만, 그 빛을 흡수할 수 없는 몸을 가진 물고기. 물고기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물고기.


절실히 필요했다.

나를 비춰줄 한줄기 빛, 그것은 내 안에 있었다. 나는 그 빛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보지 않으려 애썼다. 나를 모르는 채로, 나 자신을 외면한 채로. 그건, 눈을 뜨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잘못된 생명체가 아니었던 걸까?

미처 끝맺음을 다 하지 못한 채 태어나버린, 그런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던 걸지도 몰라. 그저 나의 서식지가 아닌 곳에 오래 머물렀을 뿐인 거야. 나에게 맞는 환경이 따로 있던 거야. 내가 숨 쉴 수 있는 곳,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는 곳.


설령 불완전한 존재라 할지라도, 분명히 있다.

나만의 길, 나의 터전이 될 그곳. 어딘가에는 있다. 불완전한 것이 완전함이 되고, 완전한 것이 불완전함이 되는 곳. 어쩌면, 완벽과 결핍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은, 언젠가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가 되어 줄 테니.


그리고 마침내 해저까지 도달했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곳에는, 나와 비슷한 생명체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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