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람빵, 느린 시간 속으로

Lampang, Into the Slow Time

by sooki

태국 북부 여행, 다시 오고 싶다고 느낀 도시_람빵


1. 치앙마이에서 람빵으로, 완벽한 길

치앙마이에서 람빵으로 향하는 길은 태국에서 만난 가장 완벽한 도로였다. 넓고 깨끗하게 뻗은 아스팔트 위로, 양옆에 늘어선 노란 꽃나무들이 터널처럼 이어졌다. 소를 실은 분홍빛 트럭 한 대가 느긋하게 앞서가고,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치앙마이에서 치앙라이 들어가는 길의 번잡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엔 관광버스의 행렬도, 오토바이의 경적도 없었다. 길가에 간간이 보이는 작은 상점들,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 과일을 파는 사람들. 그 풍경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이 길 위에서 이미 람빵이라는 도시의 성격을 예감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태국을 30년 가까이 다녔지만, 이런 길은 드물었던 것 같다. 태국은 오히여 관광지가 아닌 곳으로 향하는 길이 아름다운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이미 절반의 성공이었다.


2. 까오짜오 시장의 아침

람빵의 아침은 까오짜오 마켓(Kao Chao Market)에서 시작된다. 이른 아침,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것은 활기다. 그런데 그 활기가 시끄럽지 않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낮고, 웃음이 잔잔하고, 물건을 건네는 손길이 느긋하다. 방콕의 짜뚜짝이나 치앙마이의 나이트 바자에서 느끼는 에너지와는 결이 다른 것이다.


시장 입구에 오토바이 구르마에 장 본 것을 가득 싣는 아저씨다. 아마 인근에서 식당을 하시는 듯 보였다. 다른 아주머니는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향해 가는 그 뒷모습도 보였다. 이 모습이 람빵의 속도이지 싶다. 시장 입구 지붕 아래 양쪽으로 픽업트럭과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섰다. 큰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서면 시장이 시작된다.


시장 안에는 색색의 깃발이 천정에 걸려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주황색 삼각 깃발들이 마치 축제처럼 흔들린다. 그 아래로 사람들이 비닐봉지를 들고 천천히 걸어 다녔다. 바나나와 망고, 과일과 반찬들, 새벽부터 준비한 반찬들이 그릇마다 쌓여 있었다. 어느 시골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여기에는 어딘가 비 없는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 있었다.


시장 바깥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큰 나무 아래 천막을 친 노점 상인들. 오토바이에 기대어 서서 채소를 파는 아줌마, 휘발유 먼지 엔진에도 여유로운 얼굴로 스쿠터를 몰고 가는 여자. 이 사람들의 하루는 내가 오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고, 내가 떠난 훨씬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그 하루의 작은 틈새에 잠깐 껴든 손님일 뿐이었다.


일곱 시가 넘어서 람빵 역사 앞으로 펼쳐진 야시장도 방문했다. 일본식 덮밥 파는 곳이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주인아저씨가 이랏샤이(いらっしゃい)라며 환대해 주신다. 짧은 일본어로 인사를 나누고 덮밥 두 개를 주문했다. 수북하게 소고기 조림을 올려주시고 파도 송송 썰어 어여쁘게 담아주셨다. 태국 북부의 작은 시장에서 이런 정성스러운 한 끼를 만날 줄이야. 첫 숟가락을 떠 넣는 순간, 이 도시는 다시 와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 사람이냐며 일본어를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시장 사람들의 얼굴에는 관광객을 대하는 계산적인 미소가 없었다. 그저 일상의 일부로 나를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움. 사랑스럽다는 말이 떠올랐다. 시장이 사랑스럽다니, 이상한 표현이지만 달리 적합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3. 까오짜오의 목조 건물들

시장을 둘러싼 거리에는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붉은 나무 덧문, 낡은 양철 차양, 바랜 간판들. 중국식 봉황이 건물 앞에 매달려 있었다. 람빵에는 예로부터 화교 상인들이 정착하여 상권을 이루었고, 그 흔적이 이 건물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픽업트럭들이 목조 건물 앞을 지나가고, 스쿠터를 탄 여자가 그랩 배달원의 초록색 배낭을 메고 지나간다. '따랏 까오짜오'라고 적힌 초록색 표지판이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이 거리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세련되게 리모델링된 카페가 아니라, 세월이 그대로 쌓인 채로 살아가는 거리였다.


서울의 옛 구도심리, 을지로의 마지막 목조 가옥들이 문득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풍경이 여기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건물들에서 살고, 장사하고, 밥을 먹고 있었다. 보존이 아니라 삶 자체가 여기에서는 아직 느리고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4. 골목의 그림들

아침 시장을 빠져나와 옆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숨겨진 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좁은 골목 양쪽 벽면 가득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오렌지색과 흰색 천막이 머리 위로 드리워져 골목 전체가 하나의 갤러리 같았다. 누군가가 이 작은 공간에 꿈을 채워 넣은 것이다.


벽면에는 람빵의 옛날을 그린 대형 벽화가 있었다. 황색 옥의를 입은 스님들이 탁발을 받으며 거리를 걷고, 전통 의상의 사람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사원과 탑, 산과 강이 배경에 펼쳐져 있다. 이것은 관광객을 위한 꾸밈이 아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또 다른 벽에는 전통 의상을 입은 남녀가 빗빗한 문 위에 그려져 있었다. 집집마다 다른 이야기. 수박, 과일, 밥 그림 옆에 '반 므앙 람빵 나이 아딧 티 판마'—람빵 옛날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골목에서 나는 한 도시의 자긍심을 본 것이다


벽화 골목 건너에는 액자에 담긴 그림들이 빼곡한 상점이 있었다. 체카보드 바닥 위에 태국 관광포스터들이 금색 액자에 담겨 서 있고, 벽에는 세계 각국의 풍경화와 인물화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여기에 리싸의 사진도 제법 많이 걸려있더라는^^ 누군가의 작업실일까. 가게이자, 삶의 기록일까.


또 다른 벽에는 사원 앞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고양이를 끌고 가는 아이들, 나무에 기대어 숨바꼭질하는 아이. 그 벽화는 람빵의 영혼 같은 것이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이곳에는 넉넉했다.


5. 꽃과 식물의 도시

람빵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꽃이었다. 거리 곳곳에 보라색 꽃(한국의 등나무꽃)이 포도송이처럼 달려있고, 어느 카페(Papacraft) 입구는 보랏빛 꽃이 대문을 통째오 덮고 있었다. 꽃 보러 들어가는 것인지 카페에 가는 것인지 헷갈렸다. 이 카페는 꽃으로 사람을 부르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카페는 왕강이 보이는 가든에 온갖 식물과 꽃. 커다란 고목이 어우르져 있고 온리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블랜딩 차(로즈)들이 많았다. 맛이 좋았고 꽃과 여린 잎으로 장식을 해서 서빙하는데 이 정성에 감동. 카페는 주인의 노력이 쌓여있다. 도자기, 그림, 액세서리, 가죽제품 다양한 제품도 구매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나의 시선일 끌던 아이 하나. 초록 가지 사이로 분홍색(핑크 아니고 분홍) 열매를 단 산호 선인장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던 아이. 이 아이 이름은 립살리스(Rhipsalis)다. 길고 가는 초록색 줄기 끝에 분홍색 구슬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어여뻤다. 식집사 5년 차. 자랑스럽^^


오래된 양철통 위에 올려진 작은 꽃바구니도 기억에 남는다. 분홍, 노랑, 빨간 작은 꽃들이 햇빛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인이 아이들 물 시중을 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동시에 웃었다. 이 작은 성실함이 람빵 사람들의 성격 같았다.


카페 실내(입구 쪽 밖이 보이는)에서 보랏빛 꽃을 띄운 음료를 마셨다. 레몬 한 조각과 보라색 꽃이 얼음 위에 떠 있었다. 바람 솔솔 드는 창가에 앉아 음료를 마시니 나도 풍경도 함께 훤훤해 지더라. 사바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겠지.


6. 왕강의 노을

해질 무렵, 왕강(매왕강) 둑길을 걸었다. 강물은 건기에 얕았지만, 하늘은 화려했다. 붉은 해가 강 위에 반사되며 물을 붉게 물들였다. 3개의 태양이라니. 강 건너편 사원의 첨탑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강 둑을 걷는 사람은 나와 남편 둘이었다. 죄다 오토바이로 지난다. 흰 다리(랏싸다 삐섹) 위에 석양을 찍는 관광객 몇이 보였다. 치앙마이의 핑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었다. 강 위로 박쥐들이 내려와 낮게 날고, 강 건너 카페의 사람들도 행복해 보였다. 교각에 걸린 전구 조명이 영화처럼 짠하고 켜지진 않았지만 밤이 내리면 불빛을 내겠지. 하늘과 강물이 같은 빛깔로 물드는 그 순간이 가슴에 남는다.


둑길 옆 벽에는 닭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람빵의 상징 동물이 닭이라고 했다. 하트 안에 닭 그림, '람빵'이라는 태국어 글씨. 이 도시는 자기 정체성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새겨 넣고 있었다.


7. 담벼락 위의 고양이

강변 카페 근처에서 담벼락 위의 고양이를 봤다. 노란 털의 고양이가 붉은 목도리를 하고, 낮은 담벼락 꼭대기에 드러누워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래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고양이를 끌고 가는 벽화다. 어디 가나 벽화를 만날 수 있었다. 올드타운 쪽에 있다는 벽화는 시간 상 가보지 못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진짜 고양이와 그림 속 고양이가 공존하는 풍경. 이것이 람빵이라는 도시의 분위긴가.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서 편안하게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에서만 가능한 풍경이겠다.


8. 강과 숲과 시골길

람빵 교외로 나가면 풍경이 달라졌다. 울창한 녹음으로 둘러싸인 개천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물 위에 나뭇가지가 반사되어 초록색 터널을 만들었다. 이런 풍경은 관광 안내서에도, 어떤 블로그에도 나오지 않는다.


강변에는 대나무로 엮은 다리와 그 위에 무지갯빛 파라솔 아래에서 다리를 보수하는 아저씨가 홀로 작업 중이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었는데 아저씨도 답을 주었다. 둘이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햇빛이 물 위에 반짝이고, 그 옆에 코카콜라 파라솔이 펼쳐진 작은 카페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또 부러웠다.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길, 늘어진 나뭇가지 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쏟아진다. 이 도시의 나무들은 크고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않고 함께 살아온 흔적이었다.


9. 나콘람빵 기차역

밤이 되어 나콘람빵 기차역을 찾았다. 봉황으로 장식된 아치형 역사가 붉은 조명 아래 마치 영화 세트처럼 서 있었다. 역 앞에 치앙마이행 버스가 서 있고, 버스 차체에는 한자로 '로우대여행사'라고 적혀 있었다.


역 안으로 들어가자 SRT 전광판이 열차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란나 종이 등 각형의 램프가 게시판 사이사이에 걸려 있었다. 목제 벤치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 역의 시간은 방콕의 후알람퐁 역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에는 여유가 있었고, 그 여유 속에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거짓말처럼 기차가 들어온다. 사실은 기차 시간을 먼저 체크하고 역 앞 야시장에서 일본식 덮밥을 먹고 시간에 맞춰 나온 것이지만~


기차역은 그 도시의 성격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람빵 역은 조용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람빵 사람들처럼.


10. 다시 오기로

태국을 30년 다녔다. 방콕의 복잡함도, 치앙마이의 변화도, 남부 섬들의 관광화도 모두 겪어왔다. 그런데 람빵은 달랐다. 이 도시는 나에게 아무것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모습 그대로 거기 있었다.


아침 시장의 활기. 골목의 벽화. 강변의 노을. 담벼락 위의 고양이. 꽃으로 덮인 카페. 목조 건물의 세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된다. 안정감이다. 람빵에서 느낀 것은 안정감이었다.


길들이 넓었다. 치앙마이의 번잡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서두르지 않았다. 시장에서도, 골목에서도, 강변에서도 같은 속도가 흐르고 있었다. 그 속도가 나에게 딱 맞았다.


다시 오기로 했다. 남편이 먼저 말을 꺼낸다. 한 달 살이로. 그때는 까오짜오 시장에 매일 아침 가고, 왕강 두둑을 매일 저녁 걷고, 골목의 벽화 앞을 매일 지나다니며, 그 속에서 다큐멘터리 한 편을 기획하자고. 나도 좋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8시에 서둘러 치앙마이로 향했다 초행길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고인 물 베스트 드라이버가 앞에서 길잡이를 해줬다. 내비게이션 도착 시간보다 15분이나 빨랐다. 덕분에 세븐일레븐도 화장실도 패스하고 한 번에 숙소까지 왔다.


사바이란 바로 람빵 같은 곳에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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