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욱일기 ~ 한국사의 이해를 위한 메이지 열전
재일한국인으로써 일본에서 기업가로 대성하여 많은 존경을 받는 손정의(손 마사요시) 회장. 그가 만든 기업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IT기업 소프트뱅크이다.
소프트뱅크의 로고는 등호(=)를 연상케 하는 굉장히 단순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로고의 기원은 150년 전 한 사나이가 만든 기업에 있다.
여러 섬들로 구성된 일본 내에서도 아래쪽의 조그만 섬 시고쿠, 그 한귀퉁이를 차지한 도사 번.
그 도사번의 하급 무사(향사)로 태어났지만 출신에 연연하지 않고 일본의 새 시대를 구상하며 마침내 삿쵸동맹이라는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 낸 사람.
그 후에도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해원대를 만들어 자신의 꿈을 실현하다가 자객의 칼 아래 허무하게 스러져간 사람.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서 막부 말의 혼란기와 그가 그리고자 했던 새 일본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카모토 료마는 1836년 도사번의 하급 사무라이, 향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카모토 가문은 원래 전당포를 운영하던 상인집안이었는데 료마의 증조할아버지 대에 사실상 돈을 주고 향사 신분을 얻으면서 사카모토라는 성씨를 쓰게 되었고 아버지는 도사의 번주 야마우치 가문의 영묘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가문의 재력이 있었던 만큼 여타의 하급 무사들은 물론, 웬만한 상급무사들보다도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역시 하급 사무라이인데다가 원래는 상인가문이었던만큼 료마는 성장과정에서 많은 차별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그가 자란 도사번은 유독 상급무사와 하급무사의 차별이 엄격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 구별 자체가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야마우치 가문이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싸워 이기면서 상으로 도사번 지역을 얻게 되었고, 그 전부터 야마우치 가문을 따르던 무사가문들이 상급무사를, 이전 번주를 따르던 원주민 무사들이 하급무사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자연히 이 둘 사이에는 엄격한 상하관계가 형성되었고 심지어는 상급무사가 술에 취해 하급무사를 베어버려도 제대로 된 처벌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 탓이었을지 료마는 검술수련에만 힘을 쏟으며 실력을 키웠고 마침내는 에도의 큰 도장에 가서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를 얻게 된다.
그렇게 료마가 검술 수련을 떠난 것이 1853년, 19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이 해, 페리의 함대가 일본을 찾아오게 된다.
페리의 함대가 에도만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는 부랴부랴 동원령을 내려 당시 에도에 머무르던 각 번들의 병력을 소집해 일전에 대비하도록 한다.
다만 당연히 제대로 된 대처는 하나도 안 되어있어 소집된 병력들은 갑옷을 못갖춰입은 사람도 많았고 부족한 화포 수량을 감추기 위해 절간의 범종을 떼다가 눕혀 대포처럼 보이도록 하는 촌극도 있었다고 한다.
료마 역시 도사번의 경비병으로 차출되어 경계임무를 서던 중 페리의 함대를 실제로 목격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19살의 젊은이답게 집에 ‘오랑캐들이 상륙하면 제일 먼저 베어버리겠다’는 둥 치기어린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료마는 거대한 증기선의 규모에 완전히 압도되어버렸고 이는 서양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도사번은 지역출신 어부로써 조업 중 배가 난파되어 미국상선에 구조된 뒤 일본인 중 최초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와 서양문물을 배워 온 존 만지로의 고향이었고, 귀국한 그를 취조한 화가 가와다 쇼료를 통해 료마 역시 검술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국력과 민주주의 공화정 등 미국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료마는 큰 충격을 받았고 ‘무사를 떠받드는 신분제 토대가 바뀌지 않는 한 일본은 미국과 싸워 이길 턱이 없다’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어쩌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만 대접받는 미국의 제도가 엄격한 신분제도에 묶여있던 료마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앞서 요시다 쇼인 편에서도 얘기했듯이, 흑선내항 사건을 겪은 모두가 료마처럼 서양문물에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세에 무력하게 아무런 대처를 못한 막부를 질타하고 천황을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아 외세에 저항하자는 존황양이파가 훨씬 많았다.
특히 존황양이파는 지역을 막론하고 하급 무사들이 주축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앞서 얘기했듯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급 무사들은 신분과 기회에서 엄격한 차별을 당하고 있었고 그 불만이 막부의 권위약화를 계기로 터져나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사쿠라다문 사건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하면서 존황양이 운동은 한층 거세졌고 각지의 하급 무사들은 무단으로 탈번하여 교토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도사번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료마의 친구이자 대표적인 존황양이지사였던 다케치 한페이타에 의해 도사근왕당이 세워졌고 료마 역시 여기에 가담했다고 한다.
도사근왕당과 상급 무사들의 대립은 1862년 번의 고위직인 참정으로써 번의 개혁을 이끌던 요시다 도요가 존황양이파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절정을 맞게 된다.
이후 도사근왕당은 번의 정권을 잡고 교토에 진출하여 존황양이파 귀족들과 손을잡고 천황이 양이의 명령을 내리도록 정치공작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존황양이에 반대하는 막부의 관리들이나 무사들이 유신지사들의 손에 숱하게 죽어나가며 점차 교토의 치안은 아수라장이 되어간다.
그리고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이 존황양이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1편의 주인공, 조슈번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는 누가 서있었을까?
‘존황양이’의 반대편에는 ‘공무합체’파가 있었고, 그 공무합체파의 리더는 사쓰마 번이었다. 공무합체(公武合體)란 말 그대로 공(조정)과 무(막부)를 합치자는 주장이다.
이는 (형식적으로나마) 쇼군이 원래 조정의 신하이고, 그 권력 역시 천황에게 잠시 위임받은 것이므로 조정과 막부가 힘을 합쳐 일본을 다스리면 된다는 논리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등장한 것 조차도 막부의 지배력이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존황양이보다는 온건하다.
사쓰마번의 위치는 오늘날의 가고시마현 지역으로,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관광지로 유명한 규슈섬 후쿠오카의 남쪽에 있다.
지도에서 보면 정말 일본 본토의 서쪽 끄트머리 지역인데 사쓰마번의 지리적 특징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1) 에도와 멀고, 2) 오키나와와 가까우며 3) 나가사키 코앞이다.
우선 1) 에도와 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사쓰마번 역시 조슈와 함께 대표적인 도자마 번이었다.
그러나 2) 오키나와와 가깝단 점 덕분에 사쓰마는 일찌감찌 오키나와를 정벌해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이는 사쓰마에게 여러 이점을 가져다 주었는데, 우선 전통적으로 류큐왕국이 수행해온 중국-일본간 중계무역과 오키나와에 사탕수수의 대량재배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전세계의 전통요리 중 단맛이 나는 요리는 거의 없는데 이는 고대세계에서 당분이 그만큼 귀중한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일본요리만이 달짝지근한 요리가 많은데 이는 거의 전적으로 오키나와의 사탕수수에 기인한다(반대급부로 오키나와인들은 고구마가 주식이 될 정도로 기근에 시달렸다).
또한 오키나와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막부로부터 화폐주조권을 인정받아 유일하게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번이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점은 3) 나가사키가 코앞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사쓰마의 상인과 학자들이 쉽게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인 및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자연스럽게 사쓰마는 난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쓰마의 힘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대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그 자신이 서양식 복식을 즐겨 할 정도로 난학에 심취한 나리아키라는 강력한 재정을 바탕으로 서양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번의 힘을 키운다.
그 결실이 집성관의 설립이다.
학문연구기관과 제조시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집성관은 서양식 반사로를 갖춘 제철소를 통해 강철을 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식 대포를 모방생산하기에 이른다.
또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급무사들 중 우수한 인재들을 뽑아 교육시켜 번주 자신의 가까이에 두는데 이렇게 등용된 인재가 유신삼걸 중 둘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이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훗날 막부와의 전쟁(보신전쟁) 당시 도막파(막부토벌파)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는데 이 인물의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 하기로 하자.
어쨌건 명군 나리아키라가 짧고 화려한 치세 끝에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받은 것은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 히사미츠였다.
비록 그 자신이 번주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아들이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면서 대원군처럼 ‘국부’라는 공식직함을 갖고 사쓰마의 정권을 장악했다.
히사미츠의 최우선 과제는 나리아키라부터 이어져온 공무합체의 추진이었다.
사실 앞서 공무합체의 뜻을 설명하긴 했지만 막부말 ‘공무합체’는 주장하는 파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요술지팡이에 가깝다.
히사미츠의 ‘공무합체’ 또한 막부와 조정이 힘을 합치되, 그 중간다리 역할을 사쓰마번이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중앙정치에 사쓰마번이 진출한다는 데 방점이 있었다.
마침내 1862년(요시다 도요가 암살당한 그 해), 히사미츠는 사쓰마번군을 이끌고 교토로 상경하고 말썽을 일으키던 유신지사들과 낭인들을 제거하며 조정의 환영을 받는다.
이 여세를 몰아 히사미츠는 조정을 통해 막부에 개혁의 건의를 올리는데, 이를 연호를 따 ‘분큐의 개혁’이라 한다.
주요 내용은 1)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탄압받은 공무합체파(히토츠바시파)들의 복권(여기서 사면받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된다), 2) 교토수호직 신설(아이즈번주가 맡았고 아이즈번은 최후까지 막부를 지킨 번으로 남는다), 3) 참근교대의 완화(매년교대->3년마다로 완화) 등이 있었다.
천황의 칙서를 받은 히사미츠는 조정의 칙사를 수행하여 에도에 입성한다.
이를 받은 막부는 물론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 대놓고 조정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점차 커져가는 반대파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막부도 결국 분큐의 개혁을 수용하였고 이는 막부의 권위가 더욱 떨어짐과 동시에 조정의 위상이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
히사미츠 또한 명목상으로 아무런 관직도 명함도 없었지만 막부로부터 조정의 칙사로 공식인정을 받음으로써 그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다.
이렇게 중앙정치로의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히사미츠는 다시 사츠마군 행렬을 이끌고 교토로 돌아간다. 문제는 이 도중 영국상인 리처드슨 일행과 마주치면서 일어난다.
당시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일본에서 영향력있는 번주(급)의 행렬을 마주치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길을 비켜야 했다.
그러나 리처드슨 일행은 이러한 풍습을 몰랐고 호위무사들의 경고에도 히사미츠의 행렬을 말을 타고 지나치려 했다.
그 도중 일행의 말이 발을 헛디뎌 행렬의 중심을 거스르며 히사미츠의 가마에 접근하게 되었고 분노한 무사들은 리처드슨 일행을 무참히 베어버렸으니 이것이 나마무기 사건이다.
나마무기 사건은 당시 일본에 들어와 활발히 활동하던 모든 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당사자인 영국은 이미 이전에도 영국공사관이 낭인들에 의해 습격을 받아 예민하던 차에 이 일까지 생겨버리니 영국인들의 반일감정은 순식간에 최악으로 치닫고 만다.
당연히 영국은 사츠마번에게 배상 및 사과와 함께 책임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여기에는 영국측 요구의 번역을 맡은 젊은 시절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히사미츠의 목을 내놓아라’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마침내 1863년, 영국의 함대가 사츠마번의 배를 나포하면서 사츠에이 전쟁이 발발한다.
7척의 배로 이루어진 영국함대와 사츠마번은 2일간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 석탄이 떨어진 영국함대가 물러나면서 짧은 전쟁은 끝난다.
사츠마는 시가지와 가고시마성이 포격을 당하고 공장과 항구가 피해를 입었으나 영국측도 함선 1척 대파, 2척 중파의 피해에 13명의 사상자와 50명의 부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20년 전의 아편전쟁 당시 임칙서가 만든 11개의 해안포대를 무력화시키면서 38명의 부상자만 발생했던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큰 피해였다.
일찍부터 서양무기를 수입하고 연구한 성과가 빛을 발한 것이다.
사츠에이 전쟁은 사츠마와 영국 양측이 서로를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강화조약에서 사츠마는 영국으로부터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고(막부에게 빌려서 낸 뒤 배째라 하고 안 갚았다) 영국도 막부에 영향력을 확대하던 프랑스에 대항해 사츠마를 지렛대로 삼기로 하고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츠마의 존황양이파들은 완전히 개국파로 돌아서게 되어 적극적으로 서양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때 맺어둔 관계가 훗날 사츠마가 막부에 대항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사츠마가 내홍을 겪고 있던 1863년, 교토에서는 존황양이파 지사들과 공경들에 의해 막부로부터 양이의 약속을 받아내라는 입김이 거세진다.
마침내 1863년 4월, 막부의 실권을 잡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양이의 기일을 5월 20일로 약속하고 만다.
이는 교토의 존황양이파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막부를 굴복시킨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조슈와 도사근왕당을 비롯한 양이지사들도 여기에 호응해 각자의 지역에서 양이를 실행하기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것이 존황양이 운동의 절정이었음을.
마침내 5월 20일. 좁다란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던 서양상선을 향해 조슈의 해안포가 불을 뿜었다.
심지어 프랑스 상선의 경우 뜬금없는 공격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선원들을 보냈다가 이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행된 양이는 딱 여기까지였다.
조슈번 이외의 번들은 아무도 양이에 동참하지 않았고 심지어 도사근왕당조차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명령 앞에 꼼짝할 수 없었다.
사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속셈은 여기에 있었다.
반막부파의 기운이 무르익는 지금, 양이를 실행할지 말지를 통해 번들에게 입장을 확실히 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고, 그 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자연히 서양열강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조슈번에 분노하였다.
먼저 미국공사관이 6월 1일군함 와이오밍호를 파견하여 단독으로 조슈군 함선 4척을 침몰시키고 해안포대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군도 함선 2척을 보내어 해안포대를 재차 침묵시키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점령하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마침내는 영불미란(네덜란드) 4개국 연합군에 의해 조슈 시내까지 점령당해버리자 조슈 역시 백기투항할 수밖에 없었다(여담이지만 영국에 유학중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급히 귀국해 이 평화협정의 통역을 맡으며 조슈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된다).
결국 조슈군이 열심히 준비한 대비책이 서양열강 앞에 하나도 쓸모없었음이 밝혀지면서 존황양이파는 급격히 힘을 잃게 된다.
여기에 불을 부은 것이 천황의 반응이었다.
그 전까지는 길길이 날뛰면서 오랑캐들을 몰아내라고 막부를 닦달하던 천황이었지만 정작 일이 터지고 나자 ‘짐은 그런 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며 조슈번을 손절해버린 것이다!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존황양이파들에게 쐐기를 박은 것은 사츠마번이었다.
히사미츠는 오랜 라이벌이던 조슈번이 존황양이파의 리더가 되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토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번 무사들과 막부의 교토치안조직 신선조와 함께 이들을 쫓아내기로 한다.
마침내 8월 18일, 반조슈파 무사들이 일거에 황궁방어를 맡고 있던 조슈 무사들을 쫓아낸다.
이윽고 조정의 존황양이파 귀족들도 쫓겨나 조슈로 도망치게 된다.
이를 8월 18일의 정변이라 부른다.
도사근왕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도사의 실질적 주인인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근왕당원들에게 귀환명령을 내렸고 이윽고 요시다 도요 암살사건을 재수사하며 근왕당원들을 차례차례 할복시킨다.
도사근왕당을 이끌던 다케치 한페이타는 마지막까지 야마우치 요도를 설득시키려 했지만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할복하며 최후를 맞았고, 이렇게 도사근왕당은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본래 할복과정에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옆에서 목을 쳐주는 역할인 가이샤쿠란 사람이 있는데 다케치 한페이타는 사나이의 기개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왕자로 배를 가르고 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정쟁의 폭풍 속에서 오늘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어디에 있었을까.
다행히도 료마는 이미 1862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탈번하여 탈번낭인이 된 상태였다.
외세의 위협에 맞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그는 막부의 군함부교 가쓰 가이슈를 만나게 된다.
이미 흑선내항 전부터 난학과 서양군사학에 조예가 깊던 그는 막부가 나가사키에 해군조련소를 설립하면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특히 1860년 미일수호조약의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갈 때는 직접 선장이 되어 실습생들과 함께 네덜란드로부터 인수한 범선을 몰아 태평양을 최초로 횡단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니 신식 해군에 관해서는 당대 일본의 최고 전문가였다.
가쓰 가이슈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무역을 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쓰 가이슈와 대담을 나눠본 료마는 그의 생각에 탄복하고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길이라는 생각에 바로 그의 제자가 되기로 한다.
마침 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강력한 해군력의 필요성을 느낀 막부가 고베에 본격적인 해군조련소를 설립하면서 가이슈는 이곳의 책임을 맡게 되고 료마도 해군조련소에 입소한다.
당시 해군조련소는 인원을 채우기 위해 여러 번으로부터 교육생을 받았고 료마는 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번을 떠나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키워간다. 이것이 훗날 료마가 여러 번을 오가며 중재역할을 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사이 교토의 정세는 점점 험악해져가고 있었다.
한순간에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조슈번 무사들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켜 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되찾아오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1864년 8월 20일, 교토 황궁의 어문 앞에서 조슈군이 황궁경비를 맡고있던 사츠마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금문의 변).
사건 초기에는 조슈군이 잠시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으나 이윽고 사츠마군과 아이즈군이 연합하여 반격을 가하면서 큰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게 된다.
이로써 사츠마와 조슈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천황은 감히 황궁을 향해 총격을 가한 조슈번에 극대노하며 조슈번을 조적으로 하고 막부에게 이들을 정벌할 것을 명령한다.
막부 역시 눈엣가시인 조슈를 처리하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 여러 번들의 군사를 소집하여 1864년 9월 정벌에 나서니 이것이 1차 조슈정벌이다.
이 당시 이미 시모노세키 전쟁과 금문의 변으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은 조슈는 막부군에 맞서싸울 상황이 아니었고 다급해진 조슈번은 금문의 변 책임자들을 체포해 넘겨주는 것으로 봐주기를 요청한다.
여기서 토벌군의 주력이던 사츠마군을 이끌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것으로 조슈를 용서해주자며 조슈와 막부간에 중재를 시도한다.
여기에는 조슈를 끝장내 막부만 좋은 일 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토벌군 역시 위세는 등등했지만 사츠마를 제외하면 나머지 번들은 토벌군을 보낸 것만으로도 이미 쪼달리는 살림에 타격이 컸고, 싸움을 길게 끌고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결국 막부도 이를 수용해 돌아가니 1차 조슈정벌은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이 무렵 료마가 있던 고베 해군조련소는 금문의 변의 여파로 폐쇄되어버리고 훈련생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다.
갈곳을 잃은 이들은 사츠마번의 지원을 받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 사중이라는 조합을 설립한다.
서양과 각 번들 간 중계무역을 하며 장사를 하던 중 료마는 조슈정벌의 소식을 듣게 된다.
같은 일본인끼리 싸워서는 서양열강의 식민지가 될 뿐이라고 생각한 료마는 친분이 있던 조슈와 사츠마 양쪽을 오가며 화해를 시도한다.
료마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그간의 묵은 감정 때문에 주저하던 조슈번은 신의의 증표로써 사츠마가 영국으로부터 소총과 함선을 대리구매해주기를 제안한다.
조슈는 서해로부터 일본해로 넘어가는 길목인 칸몬해협을 쥐고 있어 자금은 충분했지만 막부의 엄격한 무역단속에 무기구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사츠마 역시 이에 동의하고 그 운반을 가메야마 사중이 맡기로 하면서 두 번은 오랜 앙금을 청산하고 힘을 합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1866년 3월, 사카모토 료마가 보증을 섬으로써 사츠마와 조슈간에 삿쵸동맹이 결성된다.
이를 바탕으로 조슈는 서양무기를 본격적으로 구매하며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또한 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서양식 군대의 힘을 절감한 조슈번 무사들이 농민과 무사가 함께 복무하는 국민군 개념의 ‘기병대’를 창설해 서양식으로 훈련시킴으로써 그 무력은 1차 조슈정벌 때와 비교도 할 수 없게 커져갔다.
마침내 1차 조슈정벌 이후 정권에서 내쫓겼던 존황양이파 무사들이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다시 조슈는 존황양이파로 돌아서게 된다.
당연히 이를 보고 있던 막부는 길길이 날뛰며 1866년 7월, 2차 조슈정벌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1차때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이미 몇 년 사이에 두번이나 전쟁에 끌려온 각 번의 군사들은 싸울 이유도, 의지도 잃어버린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가장 강력했던 사쓰마가 밀약을 통해 정벌군에서 이탈해 조슈군을 물밑에서 지원해주고 있었다.
여기에 기병대가 유격전을 펼치며 막부군을 괴롭히니 막부군은 비록 수에서는 압도하고 있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여기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마저 와병 중 사망하면서 막부군은 이를 핑계삼아 철수하게 된다.
바야흐로 막부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슈정벌 이후 삿쵸동맹은 한껏 기세를 올려 막부와의 대립을 본격화하였다.
그 와중에 료마는 고향 도사번으로부터 탈번에 대한 사면을 받고 도사번의 지원을 받아 일본 최초의 해운회사 ‘해원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해원대는 훗날 도사번 출신 상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이어받아 ‘미츠비시 그룹’으로 발전시키니 료마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일본 근현대사에 큰 씨를 뿌린 셈이다.
새로운 일본을 향한 료마의 꿈은 ‘대정봉환론’으로 결실을 맺는데, 이는 막부가 천황에게 위임받은 권력(=대정)을 돌려주고(=봉환) 평화롭게 막부를 해체해 새 시대를 열어가자는 발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교체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이 당연한 점을 생각하면 참 대담한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새 조정에 의사당을 설치하고 의원을 보통선거로 뽑자는 민주주의적인 발상도 포함되었다.
이는 도사번 지도부에도 받아들여져(삿초동맹이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뜨릴 경우 나머지 번이 찬밥신세가 될 것을 우려했다는 시각도 있다) 1867년 10월 도사번의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직접 대정봉환론을 새로이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건의하게 된다.
그렇다면 막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건방진 소리라고 길길이 날뛰었을까?
의외로 요시노부는 순순히 이를 받아들여 천황에게 쇼군직을 반납한다.
당연히 모두는 깜짝 놀랐지만 요시노부의 노림수는 대담했다.
수백년 동안 정사에는 관여하지도 않은 천황과 조정에 권력을 돌려줘봤자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과연 그 예측은 들어맞아 당황하던 조정이 다시 내정과 외교를 포함한 권력을 막부에게 위임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는 잠시나마 잠잠해지나 싶었던 토막운동에 불을 지폈고 점차 조슈-사츠마와 막부 사이에는 전운이 짙어져간다.
오늘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삿쵸동맹과 대정봉환을 성공시킴으로써 일약 정치계의 거물로 떠오르나 싶었지만 대정봉환 한달 후 교토의 간장가게 ‘오미야’에서 암살당하며 31세의 짧은 삶을 마쳤다.
그를 암살한 범인은 교토의 순찰조직 ‘미마와리구미’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암살한 배경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에서 발표한 ‘위대한 일본인’에서 료마는 오나 노부나가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혼란의 시대에 새 시대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이를 실천해 결국 거의 무혈에 가깝게 새 시대를 열어젖힌 인물이란 점이 일본인들에게 크게 다가온 것은 아닐까?
다음 시간에는 사츠마군의 총사령관 사이고 다카모리를 통해 막부의 멸망과 메이지 유신의 성립, 그리고 그 빛과 그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