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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시다 쇼인: 유신지사의 스승이자 정한론의 선구자

국화와 욱일기 ~ 한국사의 이해를 위한 메이지 열전

by 챠챠쟝

흑선내항 - 무력한 막부의 민낯을 보다

아베는 쇼인을 좋아해

2013년, 고 아베 신조 총리가 요시다 쇼인을 모신 사당에 참배하고 있다.

2013년 8월, 아베 신조 총리가 요시다 쇼인을 모신 사당에 참배를 하였다.

아베 신조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언급하였으며, 아베신조 총리의 외고조부인 오시마 요시마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리고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의 부당성을 알리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정부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은 건설적인 방식으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가야 한다“며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가 살아있었다면 양국간의 미래지향적 협력에 대한 나의 평가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저 말이 아베 총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건, 아베총리에게 '요시다 쇼인'이라는 이름이 가질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 셈이다.


아베 총리의 고향이자 그에게 8번이나 총선승리를 안겨주었던 야마구치현은 지금으로부터 170년 전인 막부말에는 ’조슈번‘이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그 조슈번 출신의 사무라이이자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처음으로 들고 나와 오늘날 일본 우익들이 사상적 선조로 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후 50년간,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일본 개항과 막부멸망, 메이지 유신, 서구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숨가쁘게 이어진 근대세계를 이끌어갔다.

일본인들에게는 역사상 다시 없던 빛나는 영광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 이웃인 한국과 중국에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치욕과 고통을 안겨준 어두운 이면이 공존하기도 한다.


분명 한중일 세 나라는 같은 시대를 살았고, 출발선도 엇비슷하였지만 정작 경주가 시작되자 한 나라는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두 나라를 식민지와 반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과연 그들의 영광을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영광이 지나간 후 그들은 왜 금방 패망으로 이어질 군국주의라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을까?


언뜻 별 관련없어 보이는 두 질문에 대한 답의 씨앗은 모두 메이지 시대에 들어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시계를 300년 정도 앞으로 돌려보기로 하자.


에도 막부, 그 찬란한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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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아 세력을 보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을 무찌르고 쇼군(정이대장군의 약자로, 일본 근대시대 최고 권력자의 통칭)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에도(오늘날의 도쿄) 막부 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도막부 시대는 앞선 150년의 피비린내나던 전국시대(센고쿠시대)가 거짓말처럼 느껴질정도의 평화의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일본의 농촌경제는 농업기술의 발달과 간척사업에 힘입어 에도막부 초기의 산출량보다 두배넘게 증가하였다. 이에 반해 징수액은 증가량에 비해 훨씬 적게 증가하였는데, 당연히 그 당시 경제총조사 같은 작업이 매우 힘들기도 했고 섣불리 세금을 올렸다가는 민란이 일어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서 나올 조슈번 같은 도자마번들의 겐세이(?)도 한몫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덕분에 일본의 농촌경제는 막부말에 이르면 풍족한 생활을 바탕으로 높은 문화수준과 교육수준을 보이게 되었다.

막부말의 참근교대를 묘사한 19세기의 그림. 어마어마한 행렬의 규모와 주변의 난전들이 돋보인다

에도막부시대 경제의 또다른 축은 상업의 발전이었다. 에도막부는 기본적으로 중앙에 쇼군이 있고 각 지방(번藩이라 한다)을 영주(다이묘大名)가문이 대를 이어 다스리는 봉건제의 형태였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제는 지방영주의 반란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다이묘가 2년에 한번씩 에도에 올라와 1년간 에도에서 머물도록 하는 참근교대(参勤交代) 제도를 운영하였다.

오늘날에도 대기업 회장님이 회의를 한다고 계열사 사장을 다 불러들이면 번쩍이는 세단행렬에 사장과 그 보좌진이 타고 모여 일대장관을 이룬다. 그 시대라고 달랐을까. 일단 참근교대를 하려면 다이묘의 가정과 조정이 다 움직이는 셈이니 거마비가 엄청났다. 그리고 에도에서는 또 다이묘가 일년간 머물 별장이 있어야 하니 그 관리비가 또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번들끼리 은근 생활수준과 관사수준에서 경쟁이 붙어 사치를 부리기 일쑤였다.

이 모든 지출은 자연히 참근교대 행렬의 경로에 있는 소도시들의 번영과 에도 내 금융업자들의 번성을 불러왔다. 전성기인 18세기의 에도는 연간 80만 통의 사케, 10만 통의 간장, 1800만 개의 장작꾸러미를 수입하고, 600 개의 책 대여소와 6천 개의 음식점을 가진 거대도시가 된다. 자연히 인구도 늘어 1731년 에도의 인구는 백만을 넘는다. 개화기 한양의 인구가 30만명이었으니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566523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okb5Rzh0YzgP%2B7OvLs7riCPfH5E%3D 빨강, 파랑, 보라는 각각 막부 직할령, 친번/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의 영지를 나타낸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도자마 다이묘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에도 막부의 모든 영주가 이 찬란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폭간의 싸움이건, 대통령 선거건 이기고 나면 내 편을 챙기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는가. 에도막부 시대의 다이묘는 친번(親藩) 다이묘, 후다이(譜代) 다이묘, 그리고 도자마(外様) 다이묘로 나뉘었다. 친번은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 다이묘들, 후다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섰던 다이묘들, 그리고 도자마는 이에야스의 적군인 서군으로 맞서싸웠던 다이묘들이다(예외는 있지만 얼추 그렇다). 당연히 일본의 꿀땅은 막부의 직할령과 친번/후다이 다이묘들에게, 주변부의 척박한 땅은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돌아갔다.


도자마번들은 높은 세금과 찬밥신세에 고통받으면서 속으로 막부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갔다. 이들 도자마번의 대표주자는 오늘의 주인공 요시다 쇼인의 고향인 조슈번이 있다. 조슈번은 모리(毛利) 가문이 통치해왔는데, 히데요시 시절의 모리 데루모토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제7군 사령관으로 조선 침공에 나섰고 시데요시가 사망할 당시 자신의 사후 아들을 보살펴줄 오대로(五大老)로 지정할 정도의 심복이었다. 자연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의 총대장을 맡았으나 여기서 패하면서 영지가 쪼그라들었고 조슈번의 쌀 소출량은 120만석에서 29만석으로 급감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조슈번의 다이묘와 신하들은 원한에 이를 갈았고, 매년 정월초하루가 되면 신하들이 다이묘에게 "막부를 격퇴할 때가 왔습니까?"라고 묻고, 다이묘는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의식이 있었을 정도이다.


이러한 왜곡된 구조 속에서 도자마 번들은 고통받는 동시에 점차 막부의 영향력을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기도 한다. 다시 앞의 조슈번 이야기로 돌아가면, 에도 막부 성립 직후인 1610년 새로 토지조사를 한 결과 쌀 산출량이 52만 석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조슈의 신하들은 이를 곧이 곧대로 막부에 보고해봤자 세금만 늘거라는 현실적인(?) 충고를 하고 다이묘도 이를 받아들여 36만석만 보고를 한다. 이후 앞서 말했듯 조슈번의 쌀 산출량은 계속 늘어갔지만 놀랍게도 막부 멸망까지 조슈번의 '공식 산출량'은 36만 석으로 유지되지만 실제 산출량은 71만 석에 이르렀다. 다른 대표적인 도자마번인 사쓰마 역시 마찬가지로 공식 산출량은 77만 석이었지만 실제 산출량은 87만 석이었다. 당연히 막부의 세금은 '공식 산출량'에 근거해 책정되므로 둘 간의 차이는 고스란히 각 번의 '비자금'이 되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 당시 두 번이 주역을 맡는 기반이 되었다.


난학의 시대 - 서구문물의 예방접종

시마바라의 난(1637)을 표현한 그림. 기독교 박해와 조세문제가 겹쳐 일어난, 에도막부 초기의 대규모 민란이었다

에도막부의 대외정책은 '쇄국'으로 표현된다.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도 쇄국이었다. 그렇다면 둘은 같았을까? 결정적인 차이는 '데지마'의 존재였다.

센고쿠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화승총으로 눈부신 전과를 거둔 이래, 다이묘들은 서양과의 교역이 갖는 이점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앞다투어 서양의 무기를 들여왔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전파시킨 기독교가 점차 일본의 토착문화와 갈등을 빚고, 이 갈등이 규슈 북부 시마바라 지역에서 키리시탄(일본인 기독교 신자)들이 시마바라의 난(1637)이라는 대규모 민란으로 터져나오면서 에도막부는 기독교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카톨릭 국가 상인들의 출입을 금지한다.

데지마의 모형. 이처럼 인공섬의 형태였지만 지금은 주변도 다 매립되어 실제위치는 나가사키 도심속에 있다.

그러나 신교국가인 네덜란드는 종교전파에는 관심이 없고 무역만 할 것임을 명백히 함으로써 막부 말 개항 전까지 일본과의 교역 독점권을 손에 넣는다. 물론 무분별한 외국과의 접촉이 에도 막부 입장에서 좋을 것이 없으므로 인공섬을 만들고 그곳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데 이 곳이 오늘날 나가사키의 이색여행지로 유명한 데지마(出島)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상관장에게는 독점교역의 대가로, 1년에 한번 세계의 소식을 정리한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를 들고 막부에 보고할 의무가 주어진다. 이는 막부가 세계를 접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개항 이전 이미 베스트팔렌 조약, 나폴레옹전쟁, 미국의 독립 등 세계사정을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개항과정이 비교적 저항없이 부드럽게 이뤄진데는 화란풍설서를 통한 세계정세의 냉철한 파악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의사들이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해 발간한 해체신서. 난학의 대표적 성과물이다

데지마가 끼친 또 한가지 영향은 데지마에 주재하는 네덜란드 의사, 상인,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한 서양과학기술의 접촉이었다.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일본의 지식인들은 열심히 서양의 지식을 배워갔으며 대표적으로 일본 의사들이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해 발간한 '해체신서'가 있다. 이 해체신서 저자들의 대표인 스기타 겐파쿠는 만년의 회고록에 자신들이 네덜란드어를 모르고 번역가들도 자신들의 직업을 잃을까봐 소극적인 가운데서 의사들이 하루종일 모여 단어하나를 추측해 번역해가던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이처럼 난학은 비록 어려웠지만 일본인들은 전혀 새로운 과학체계를 받아들이는 즐거움으로 조금씩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해갔다.

이에 반해 조선의 대외관계는 명/청과의 조공관계, 일본과의 조선통신사 파견 및 동래도호부와 부산왜관을 통한 교역이 전부였으므로 일본과 같이 서양사정을 접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조선이 처음 서구국가를 마주했을 때는 금세 접전으로 치달았지만 막부는 네덜란드어와 중국어를 거쳐서라도 미국인들과 소통을 하고 협상을 할 정도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편전쟁 -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붕괴

19세기 중국의 아편굴.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은 재산을 다 처분하고 마누라와 딸까지 팔아넘겨 아편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반쯤은 느긋하게 세계정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에도막부를 화들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거대한 청나라의 아편전쟁(1840~42) 패배소식이었다.

영국과 청나라는 오랫동안 무역을 이어왔지만 그 수지는 번번이 영국에게 적자였다. 영국은 청의 차와 도자기가 필요했지만 청이 영국에게 사가는 것은 신기한 잡화 정도였지 영국의 자랑이던 인도산 면직물조차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에 고민하던 영국상인들은 점차 인도산 아편을 밀수해와 청나라의 인민들을 중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된다. 당연히 분노한 청 정부는 청백리로 이름높던 임칙서를 호광총독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즉각 항구에서 아편 전량을 몰수해 폐기처분해 버렸다. 너무도 당연한 주권행사였으나 분노한 영국의회에서는 6표의 차이로 전쟁이 결의되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아편전쟁 당시 청군은 신식무기와 함대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거의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개전결과는 허무하게도 영국군이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채로 상하이, 난징을 함락해 청의 물류망을 완전히 막아버리며 2년 만에 사실상 항복으로 끝나게 된다. 그 결과 중국사 최초 영토의 할양(홍콩)과 함께 5개 항구의 추가개항,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이 체결되니 이것이 난징조약이다.

이 전까지 동양국가들에겐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게도 청나라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 나폴레옹조차 중국을 가리켜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껍질을 벗겨 알맹이가 종이호랑이였음을 확인한 서양국가들은 이후 침탈을 본격화하게 되고 이것이 중국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아Q식 합리화 일색이었던 청나라와 아예 무덤덤했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였다. 앞으로 서양국가들이 개항과 교역을 요구해 올 때는 총포도 함께 따라올 것이라는 점을.

오늘의 주인공, 요시다 쇼인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도 이 시점이다.


흑선내항 - 무력한 막부의 민낯을 보다

쇼인의 동상. 인기가 높은 쇼인인 만큼 일본 곳곳에서 그의 동상과 인형을 만나볼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막부 시절이던 1830년, 지금의 야마구치 현에 있던 조슈번의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조선 철종임금이 31년생이니 거진 동년배인 셈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대단한 천재였는지 12살에 조슈번의 번주 앞에서 강의를 하고 19세에는 번 공립서당의 사범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엘리트 코스를 밟아 무난한 학자가 되었을 것 같은 그였지만, 그가 스무살이 되던 1850년이면 이미 아편전쟁의 결과가 일본사회 전체에 전해져 들쑤신 벌집이 되었을 때이다. 요시다 쇼인도 데지마, 에도 등 전국을 떠돌며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로 결심했고 심지어 러시아를 경계하여 도호쿠 지역을 방문할 때에는 막부의 공식 통행허가증 발급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단탈번까지 감행했다고 하니 얼마나 피끓는 청춘이었는지 느껴진다.

소속번이 엄격히 강제되던 사무라이에게 탈번은 사형감이었지만, 번주는 그의 천재성을 아깝게 여겨 견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사면해 주고 오히려 10년간의 국내유학까지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쇼인의 견문과 사상은 크게 넓어졌고, 이는 그가 유신지사들의 스승으로써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

흑선의 기록화. 섬나라이니 해군이 발달했으리라는 우리의 상상과 달리 막부는 해군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쇼인이 23세가 되던 1853년, 결국 모두가 우려하던 사건이 벌어진다. 도쿄 앞바다 우라가만에 검은 배들이 나타난 것이다. 생김새 그대로 ‘흑선(쿠로후네)’이라고 불렸던 이 배들은 미국의 올리버 페리 제독이 교역과 개항을 요구하기 위해 끌고 온 것이었다.

막부는 올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답변을 늦추고 시간을 끌어 저항해보려 한다. 불행하게도, 페리제독은 이 모든것을 예상했다는 듯 함대를 끌고와 에도만 앞바다를 봉쇄해 에도의 물류를 막아버린다. 조선의 강화도, 청나라의 텐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내륙운송이 힘들고 대부분의 물류가 수운으로 이루어지던 체제에서 수도 앞 물길이 막혔다는 것은 곧바로 막부에게 체크메이트를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부역시 이 치명적인 약점을 막기 위해 해안포대를 건설해놓았지만 막부의 구식대포 바깥에서 쏴대는 페리의 신식대포에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 포대는 오늘날 도쿄의 유명관광지 오다이바라는 유산(?)만 남긴다.

daiba_park02.jpg 오다이바 내 다이바 공원의 포대 유적

흑선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등장은 근 삼백년간 잔잔함을 유지해오던 막부라는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같았다. 막부는 위협에 대처해 단호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나라를 지켜야 했지만 현실은 쇄국파와 개국파의 치열한 갈등으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쇼군마저 중병으로 국사를 돌보지 못하자 대신 정치를 돌보던 로주(老主, 막부의 최고 관직) 아베 마사히로는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지만 이조차도 의견의 통일을 보지 못한다. 여기서 아베는 뜬금없는 결정을 하는데, 교토의 천황에게도 미국 대통령이 보낸 국서의 번역번을 보내고 천황과 조정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한량이던 내가 나라의 중심이 되어버린 건에 대하여

Xww-ojGMW1XnNHZv6q-AfcJWutRw6fC8cJaQ5sxIoicGH7QiXXXkcmVXJik3qCVqmdTPs_dEBXwTLNQJcThZ7A.webp 에도막부 중후기 교토 귀족의 모습. 모습은 멋지지만 실권은 하나도 없는 한량들이었다.

천황(天皇). 국내 뉴스에 이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극렬한 논쟁이 벌어지며 '일왕(日王)'이라고 불러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이때까지 천황은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이미 막부 이전의 헤이안 시대 중기(850년 경)부터 외척들이 득세를 하면서 천황은 일선에서 물러났고 무사들에 의해 막부가 세워지면서는 천황과 귀족들까지 모조리 교토에 사실상 유폐되어 자기들끼리 차나 마시고 한담이나 하는 한량들일 뿐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막부의 지원에 의존할수밖에 없어 항상 재정은 궁핍했다. 일본 개항 당시의 천황이었던 고메이 천황의 일화에 따르면, 수라상에 오르는 생선은 모조리 썩어 악취가 나서 먹을 수 없었고, 궁궐 연회에는 술이 모자라서 물을 타서 마셨으며, 연회상에 연어 한 조각이 남자 천황이 직접 '이건 쟁여두었다가 내가 저녁에 먹겠다'고 할 정도의 짠한 형편이었다.

그러니 막부가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보내며 조정의 의견을 묻자 오히려 천황과 귀족들이 당황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의견을 물었으니 토론이 벌어졌고, 여기서도 의견의 통일을 보지는 못했지만 관백(關白, 조정의 최고귀족) 다카츠카사는 한술 더 떠 막부의 사신에게 앞으로 막부가 이에 대해 결정을 하면 반드시 조정에도 통보하라는 무엄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결국 막부가 조정에게 의견을 물은 것은 득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국사에 관해 조정의 의견을 묻는다는 안좋은 선례만 만들고 끝난다.

Emperor_Komei_Portrait_by_Koyama_Shotaro_1902.png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 생김새부터 그득해보이는 그의 고집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단초가 된다

페리의 내항으로부터 4년이 지난 1857년, 기나긴 협상 끝에 막부와 미국은 '미일수호통상조약'초안을 마련한다. 나가사키를 미국에게 개방하고 미국인들이 상주할 수 있도록 시모다와 하코타테를 열어주는 역사적인 개항조약이었다. 더불어 여기에는 '일본에서 미국인이 죄를 지으면 미국영사가 이를 재판하고 미국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영사재판권 조항이 포함된다. 이는 곧 치외법권으로써 훗날 불평등 조약의 핵심으로 찍혀 일본이 두고두고 개정하려 노력하는 눈엣가시가 되지만 이 시절의 일본인들은 이 의미를 아직 알지 못했다(그리고 훗날 조선에게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똑같이 써먹는다...).

어쨌거나 막부로써는 청나라처럼 나라가 불바다가 되는 것은 막았으니 나름 어려운 숙제를 선방한 셈이다. 특히 훗날 제국주의가 심화된 시절 조선에 찾아온 서구열강들이 보인 태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제 앞서 조정의 요구대로 막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알리는 사신을 교토로 보낸다. 막부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의례적인 절차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판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고메이 천황이 대노하며 절대수용불가 방침을 밝힌것이다!


천황의 비빌언덕 - 존황양이(尊皇攘夷)파

막부로써는 그간 병풍취급 해오던 천황이 난데없이 훼방을 놓으니 천황의 반대가 얼마나 실질적 영향력이 있는지는 둘째치고 체면을 제대로 구겨버린셈이다. 그러나 천황 역시 아무 뒷배없이 덤빈 것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존황양이파가 있었다.

Dainihonshi.JPG 대일본사. 250년에 걸친 집필작업은 내용을 떠나 절로 숭고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말 그대로 '천황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격하자'는 존황양이파의 원조는 역설적이게도 도쿠가와의 친번 중 하나인 미토번이었다. 18세기에 들면서 일본에서는 중국에 대항하여 일본 고유의 정서와 역사를 탐구하는 국학(國學)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조선 역시 진경산수화나 소중화 사상을 통해 고유의 것을 탐구하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일본의 고전문학과 고대역사 정리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지만 역사를 거슬러갈수록 필연적으로 천황과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가가 고대부터 한 핏줄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믿음)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도쿠가와의 방계인 미토번은 대대로 이 분야에 정통하기로 소문났는데, 이미 에도막부 초기인 1657년부터 일본의 역사를 정리하는 '대일본사'편찬작업을 시작했고 이 작업은 메이지 시대인 1902년에야 끝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자연히 이 과정에서 천황과 일본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온갖 살이 덧붙여졌고 이는 곧 존황사상으로 이어지며 외국오랑캐에 반대하는 양이사상과 합쳐져 존황양이사상이 되었다. 조선으로 치자면 위정척사(衛正斥寫,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친다)라 할 수 있겠다.

f3d04756a172b4b019de516d7f990233.jpg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이쑤시개도, 먹을 것이 없어 쫄쫄 굶어도 '난 고기 먹었다'는 가오(?)를 못버린 하층사무라이들의 폼생폼사에서 비롯되었다

언제나 새롭고 반항적인 사상이 그렇듯, 존황양이 사상 역시 막부체제의 상층부보다는 하층부에 널리 스며들었다. 특히 엄격한 신분제에 따라 승진은 막히고 할일은 없고 생활은 고달파 불만이 가득한 하층 사무라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존황양이사상에의 과몰입(?)은 자연히 막부에의 불만으로 이어졌고 일부는 번의 경계를 떠나 교토같은 곳에서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작당모의를 하였는데 이들을 '존황양이지사(志士)'라 하였다. 이 존황양이지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어디였을까? 당연히 친번, 후다이번 보다는 원체부터 불만많던 도자마번, 그 중에서도 조슈번이었고, 그 우두머리가 오늘의 주인공 쇼인 되시겠다.


쇼가손주쿠 - 유신지사의 요람


송하촌숙 유적. 자그마한 것이 그야말로 복작복작 둘러앉아 토론을 벌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 같다.

흑선내항과 개국과정은 쇼인에게도 에도막부의 무력함을 깊이 실감하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유학을 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정박해 있던 흑선에 도항을 감행한다. 가까스로 도항에 성공해 페리제독을 만나 유학을 요청하였으나 당연히 페리제독은 이를 거절했고, 낙담한 쇼인은 돌아가 막부에 자수해 14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한다 (같이 도항한 친구는 옥사).

1855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주변에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가르침을 청하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에는 이들을 개인과외식으로 가르쳤으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857년 정식불법사학(?)을 개설하니, 이것이 조슈번 유신지사들의 요람이라 불리는 송하촌숙(松下村塾)이다.

젊은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그도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다.

쇼카손주쿠가 기존의 교육기관들과 다른 것은 신분에 관계없이 실력만 있다면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다는 점인데, 젊고 야심만만한 하급사무라이들이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이들은 쇼카손주쿠의 상호 간 자유로운 토의를 통한 교육에서 탈출구를 찾았고, 쇼인에게 배운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과 존황양이 이념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막부체제에 대한 불만과 버무려지며 도막파의 주역으로 태어나게 된다.

주요 인물로는 다카스기 신사쿠(신식군대 키헤이타이를 조직, 보신전쟁 승리에 공헌), 이토 히로부미(메이지 내각 초대총리, 초대 조선통감), 야마가타 아리토모(3대 총리, 군국주의의 아버지) 등이 있으니 그야말로 일본 근대사의 스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 - 막부의 마지막 권위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cfile%2Ftistory%2F2142B04C510DD86B0D 이이 나오스케. 그도 한고집 해보인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고메이 천황의 뜻밖의 반대에 부딫힌 로주 홋타 마사요시는 어떻게든 천황을 설득해 재가를 받아보려하지만 끝끝내 실패하고 결국 본인도 낙담해 로주 자리에서 물러난다. 홋타의 뒤를 이은 것은 히코네번의 다이묘 이이 나오스케로 후다이번들의 대표격이었다. 중병에 걸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죽기 직전 그를 다이로(大老)에 임명하면서 그는 막부 최후의 최고실권자가 된다. 다이로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만 임명되는 특별직으로써 막부 역사를 통틀어 단 세명뿐인 자리였으니 그의 권세가 실감이 난다.

안세이 대옥으로 체포당하는 존황양이지사.

다이로가 된 그가 처음 한 일은 막부의 권위에 도전했던 다이묘들과 존황양이지사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처벌하는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이었다. 막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막부와 천황의 갈등은 개항을 비롯, 막부에 대한 불만들을 거름 삼아 점차 ‘막부를 때려 엎자’는 도막파의 형태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에 이이 나오스케는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 판단, 100명에 이르는 존황양이파 지사를 잡아들여 처단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쇼인도 지사들 중 한 인물을 만났다는 제보가 있어 참고인 조사차 관부로 압송된다. 막부 조사관은 당초 목적대로 그와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었건만, 쇼인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난데없이 막부 고관의 암살계획을 털어놓는다!

내막인즉슨, 쇼인 역시 천황의 허락을 받지 않은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이에 언젠가 제자들과의 사석에서 막부의 고관을 납치하여 조약의 해지를 요구하고 수틀리면 본보기를 보여주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쇼인은 이를 술술 불어버렸고, 놀란 막부는 쇼인 역시 처형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세이 대옥의 마지막 처형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신지사들의 스승은 향년 30세로 짧은 삶을 마치게 된다.

그의 자백은 난데없는 해프닝이었을까, 아니면 두터운 현실의 벽 앞에서 죽음으로써라도 자신의 뜻을 항변하고 싶었던 지식인의 지조였을까?


사쿠라다몬의 변 - 막부의 권위, 땅에 떨어지다


안세이 대옥으로 골칫거리들을 어느정도 정리한 이이 나오스케의 다음 행보는 '일미수호통상조약'의 정식체결이었다. 천황은? 당연히 패싱했다. 단호한 그에게 천황의 반대는 모깃소리만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지 못한 점은 막부도 옛날의 막부가 아니고, 천황도 옛날의 천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쨌든 명목상 쇼군은 ‘천황에 의해 임명받은 정이대장군’이다. 전두환조차 사후승인일지언정 참모총장 연행에 대통령 싸인을 필요로 했지 않은가.

중대한 외교문제를 상의하는 ‘척’도 없이 패싱 해버린 나오스케에게 당시 고메이 천황은 극노하였고, 여기에 주변 존황양이파들의 꼬드김에 덴노는 번 중 전통적인 존황양이파이던 미토번에 불만을 담은 밀칙을 내리니 이를 ‘무오년의 밀칙’이라 한다.

그러나 이번엔 허수아비 천황이 막부를 패싱하고 번에게 다이렉트로 명령을 전한 셈이니 막부 또한 심기가 불편해짐은 자명한 것(마치 삼국지의 한나라 말기 황제와 조조의 모습같지 않은가?). 이를 계기로 천황과 막부의 오랜 공생에 깊은 감정의 골이 파이게 되고 점차 주변에 불온한 공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사쿠라다몬 밖의 변을 다룬 영화 포스터. 막부말기 내내 이어질 정치테러의 시초같은 사건이었다.

1860년 3월. 이이 나오스케는 쇼군을 알현하기 위해 에도성의 사쿠라다문(櫻田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순간 문 주변에서 서성이던 몇명의 무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와 호위병들을 처치하고만다. 이것이 사쿠라다문의 변이다. 당연히 이들은 곧 체포되었는데, 대부분은 미토번의 존황양이지사들이었으며, 자신들이 체포되면 번주에게 폐를 끼칠 것을 우려해 미리 탈번서를 내고 낭인의 신분이 되었을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전원 쇼군의 명에 따라 할복했지만 이이 나오스케라는 구심점을 잃은 막부 내 강경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여기에 새로 등극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과 존황양이지사들에 대해 유화책으로 돌아섬으로써 정국은 미궁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015081542396303.jpg 1932년 이봉창 의사 역시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여담이지만 사쿠라다문은 우리 역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바로 72년 뒤인 1932년, 이봉창 의사가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 천황(나중에 일본패망 후 인간선언을 하는 그 사람)에게 폭탄을 던지는 '사쿠라다문 의거'를 행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목적달성에는 실패하였지만 성공하였다면 사쿠라다문은 일본역사에 암살명소로 길이길이 남을뻔했다.

쇼인과 정한론

정한론이 담긴 쇼인의 ‘유수록’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정한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한론이 그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도 보이듯 조선은 대륙진출의 교두보라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와 동시에 조선침략 자체가 지금의 북풍처럼 내부결속용 단골 레퍼토리였다. 아편전쟁과 흑선사건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낀 그로서는 마찬가지로 조선을 조국 일본이 근대화하기 위한 제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저서 『유수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분할하여 빼앗고, 남으로는 대만, 필리핀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 점차 진취의 기세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 부분이 바로 고대 일본의 진구황후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정벌하고 조공을 받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뜻한다. 쇼인이 얼마나 정한론에 진심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허언을 기어코 현실에 구현해 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흔들게 된다.

노파심에 얘기하지만, '쇼인이 정한론의 주창자가 아니다'는 것으로 그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한론이란 조금만 식견이 있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법하고, 또 매력적인 선택지라는 점이다. 그러니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해 누군가 특정개인을 원흉으로 찍고 비난하기는 쉬우나, 그보다는 그 시대뿐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얼마든지 '일본의 조선침략'은 항상 상정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비하는 것이 역사에서 배우는 옳은 방향이라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두 주역번(죠슈, 사쓰마) 중 한쪽의 지사들을 키워낸 스승임과 동시에 정한론을 통해 향후 메이지 정부의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더불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아 전국을 유랑하고 견문을 넓혀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 모습은 그 시절 뜻있는 사무라이들의 표본 같은 삶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유신의 다른 한축인 사쓰마의 대표인물인 동시에 또 다른 ‘정한론’ 주창자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삶을 통해 막부의 붕괴와 메이지 유신의 과정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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