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 engineers: 과학으로 전쟁하기
바퀴, 그 위대한 탄생
가끔 세계의 유력 매체에서 '세계 100대 발명품'식의 기사를 내곤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근현대의 발명품은 매번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대체로 먼 과거, 인류문명의 시초에 해당하는 항목들은 이견이 없다는 점이다. 그 중 바퀴는 문자, 농경 등의 굵직한 친구들과 함께 인류문명의 선조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지금 와서야 과연 이것이 발명인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바퀴의 발명 이전 인류의 노동효율은 바닥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 아무리 힘을 들여도 그 상당부분을 강제로 열과 소리로 변환시켜버리는, '마찰'이란 놈의 끈덕진 방해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도보로 짐을 지고 이동하면 나았지만 이번엔 무게에 제한이 걸렸기 때문에 자연히 고대의 생활과 교역은 '가벼운 근거리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가 물건을 끌고올 때 둥근 통나무들 위로 끌어보니 힘이 덜 들더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인류는 점차 '물건을 끄는 것보다 굴리는게 낫다'는 사실을 이해해가게 된다. 물리학에서 '구름저항(rolling resistance)'로 알려져있는 현상이다. 이윽고 처음엔 그대로 쓰이던 통나무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필요없는 부분이 여기저기 잘려나가게 되었고, 마침내 가운데 부분이 전부 깎여나가 아령모양이 되었다가, 통나무 결에 따른 갈라짐을 막기위해 원판을 여러겹 붙여 만든 바퀴에 막대기가 끼워지게 되면서 현대까지 이어져내려오는 바퀴의 형태가 완성된다. 최초의 바퀴는 기원전 35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우연인지 비슷한시기 인도와 중국에서도 바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여태껏 몽둥이를 든 인간들의 싸움이던 '전쟁'의 형태가 전세계적으로 급격히 변화하게 된다.
전차의 탄생: 교역보다 전쟁
바퀴의 탄생은 마찰력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어 인간의 수송범위를 넓혔다는 점 이외에도 한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본격적으로 동물의 노동력을 이동과 전쟁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물의 노동력이라 하면 흔히 밭에서 소가 쟁기를 끄는 장면을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건 철기시대 이후에나 보편화된 모습이다(나무쟁기는 약해서 쓰기 힘들었다). 물론 당나귀나 소를 이용해 물건을 끌게한 건 그 전에도 었지만 사람에게 힘든 일, 동물이라고 나을리 없다. 결국 본격적인 동물노동력의 사용은 바퀴를 사용한 수레의 탄생 이후라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이 거의 농기구로 쓰인 적이 없듯, 최초의 바퀴 또한 그것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품은 상상이상이었기에(통나무를 얇은 원판으로 깎아 겹치고 흔들림 없는 중심축을 다듬는 일을 '돌칼'로 한다고 상상해보라) 자연히 최초의 수레또한 농상업보다는 의례와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창칼과 활을 든 보병위주의 전장에 전차(charriot)가 가져다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최초의 전차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위 그림에서 보듯, 그 모습은 짐수레 위에 사람이 탄 정도의 단순한 것이었지만 이내 고대의 전장을 압도하였다. 다른 장점을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보병보다 나은 기동력은 원하는 곳에서 전투를 시작하고 후퇴할 권리를 사용자에게 부여했다. 운동에너지에서 오는 파괴력과 충돌력은 덤이다.
그리고 고대의 군사강국 이집트 역시, 그들의 라이벌 히타이트를 통해 전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 전차에 이르게 되면 전차의 유용성을 극대화시켜줄 몇가지 개량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선 바퀴가 기존의 통나무 바퀴에서 벗어나 바큇살로 연결된 차륜형으로 변화했다. 물론 바큇살들과 테두리를 한치의 빈틈도 없이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지만, 차륜형바퀴는 더 가벼우면서도 지면의 충격을 흡수해 탑승자의 피로를 감소시켜주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또 차체 자체도 더 가벼워지면서 이륜형으로 변화했다. 이는 개선된 마구(馬具)와 결합해 기존 사륜전차에 비해 운전을 월등히 쉽게 만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무기체계역시 투창에서 합성궁으로 진화하였다. 나무, 동물의 근육, 그리고 뿔을 아교로 붙여 만든 활대는 더 작으면서도 200미터에 이르는 우월한 사거리 덕분에 전차같은 제한된 환경에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오랜 검증기간을 거쳐 최고급 전차와 숙련된 전차병으로 이루어진 전차군단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인집단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은 빠른속도로 기동하며 보병의 화살이 닿지않는 곳에서 화살을 연사하여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시체의 산을 만들었다.
자연스레 고대 중동국가들의 전차경쟁은 누가 더 많은 전차를 보유하냐는 최초의 군비경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BC 1275년 경의 카데시전투에서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국이 각각 5000대, 3500대라는 어마어마한 전차를 동원하면서 보병의 역할은 전차를 보조하는 역할로 밀려나게 되었다. 상당한 전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거의 무승부에 가까웠지만 당시의 파라오 람세스는 비문에 카데시에서의 장쾌한 승리, 그리고 그 덕을 자신의 우월한 지휘력으로 돌림으로써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이집트 전차부대의 용맹을 전해주었다. 비록 그 뒤로 너무나 전차의 우월함에 만취한 나머지 군사기술발전을 게을리 해 1000년 쯤 뒤에는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차례차례 정복당하게 되지만 말이다.
기병의 등장과 전차의 몰락
그러나 무적의 집단같던 전차부대 역시 문제점이 있었다. 전차가 비싸고 병사 양성에 많은 노력이 든다는 점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그런데다가 지형까지 심하게 탔다. 평원에서야 감히 누가 전차부대에 대적하겠냐마는, 조금만 지형이 울퉁불퉁해져도 전차는 쉽게 기동불능에 빠지곤 했다. 급기야 마찬가지로 전차를 적극활용한 중국에서는 상대국에게 항복을 받은 후 밭고랑의 방향을 동서로 낼것인가 남북으로 낼것인가까지 따지게 하는데, 이 역시 밭고랑을 쉽게 넘지 못하는 전차의 특성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륜전차로 넘어오면서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전차는 운전하기에 쉬운 물건은 아니었다. 애초에 끄는 말들만 해도 적게는 두마리에서 많게는 네마리까지 갔으니 말이다.
기병의 출현은 이러한 단점을 일거에 해결하면서 전차를 단숨에 도태시켜버렸다. 사실 고대인들 역시 말을 직접 타면 전차의 효용성이 크게 줄어든다는 점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고대의 말이 승마에는 적합하지 않은, 조그맣고 척추가 약한 짐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끝끝내 교배를 통해 덩치가 크고 우람한 전투용말을 탄생시켰고, 훨씬 저렴하면서 유연한 기병 앞에 거의 직진밖에 못하는 전차는 손쉬운 사냥감일 뿐이었다. 이후로도 전차는 그 상징성과 뽀대(?)덕분에 왕실의 의장용으로는 오랜기간 살아남지만(브란덴부르크 문에도 달려있듯 서양에서 4두마차는 영광과 권력의 상징이다) 전투용으로는 그 가치를 상실한 채 몰락하게 된다.
그럼에도 최초의 전차가 가져다준 충격은 인간의 전쟁의 형태를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전차의 개량형 후손인 기병은 화약의 발명 이전까지 압도적으로 전장을 지배하였고, 현대까지도 정찰 및 기습용으로 전장에서 살아남아 활약하고 있다. 또 튼튼한 장갑과 막강한 화력을 갖춘 현대의 전차(Battle tank)는 고대전차의 모습 그대로, 실제 능력을 떠나 단신으로 마주한 보병이 저도 모르게 주저앉게 만드는 충격력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쯤되면 최초의 전차를 만들었던 수메르인들도 저 세상에서 자신들의 성과에 만족하며 함박웃음을 짓고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