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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쟝 Jan 28. 2024

2.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 유신의 빛과 그늘

국화와 욱일기 ~ 한국사의 이해를 위한 메이지 열전

세고돈!!     

NHK의 2018년 사극, 세고돈

2018년 NHK의 신작사극 제목은 ‘세고돈’이었다. 

언뜻 덮밥 이름같은 이 제목은 ‘사이고님(도노)’을 가고시마 사투리로 읽은 것이다. 

포스터의 해맑은 청년이 보여주듯 이 드라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여주었고 관서지방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우에노 공원의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지금도 도쿄의 벚꽃관광명지 우에노 공원에 개와 산책하는 소박한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듯 사이고의 인기는 같은 유신삼걸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아마 뜻있는 유신지사로 시작했다가 결국 반역자로 삶을 마감한 그의 생애가 뭇 사람들의 가슴을 끓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생애는 유신의 영광과 함께 오욕까지 드러낸, 그야말로 유신 그 자체같은 삶이었다.

그리고 말기의 정치투쟁 와중에 또 ‘정한론’을 끄집어내며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뜻하지 않은(?) 욕을 먹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격동의 메이지 유신의 현장으로 떠나보자.     


도자마번 – 막부체제의 아웃사이더     

전국시대의 마지막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 일본이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싸운 얘기가 기억날 것이다.

이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이겨 이후 막부체제를 열게 된다.

그러면 막부체제 하에서 한때 이에야스에게 칼을 겨눴던 ‘서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막부체제 하의 번들은 세 등급으로 나뉜다.

우선 핏줄이 최고이니 도쿠가와 직계 후손들이 ‘친번’을 이루며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경우 양자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음으론 ‘동군’편에서 승자가 되었던 번들이 ‘후다이번’으로써 알짜배기 땅들을 차지했다.

그러면 마지막은? 당연히 ‘서군’이었던 ‘도자마번’들이다.

이들은 원래 영지를 빼앗긴채 오지의 조그만 영지로 강제이주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도자마번의 대표주자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는 ‘조슈’와 ‘사쓰마’번이다.

조슈와 사쓰마의 위치. 정말 외지다...

조슈번은 저번시간의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열심히 세력을 키운다는 얘기를 했었다.

오늘의 주인공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번 출신이다.

지도에서 조슈와 사쓰마번의 위치를 찾아보면 그 특징이 단박에 보인다.

대략 하코타 돈코츠라면으로 유명한 후쿠오카의 북동쪽과 남쪽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후쿠오카의 서쪽에는 나가사키가 있다.

즉 조슈와 사쓰마는 1. 도쿄에서 멀고 2. 홀대받고 있으며 3. 서양문물을 접하기는 좋은 위치로 혁명의 발상지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사쓰마의 경우 보다 서쪽의 오키나와(류큐국)를 수탈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이득도 얻고 있었다.     

오키나와(류큐왕국)의 왕궁, 슈리성. 일본과 미묘하게 다른 건축양식만큼 일본-중국 간 중계무역으로 꽤 번성하던 국가였다.

여담이지만, 전세계 전통요리 중 단맛이 나는 요리는 찾기 힘들다. 

이는 설탕이 근대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농업 이전까지 대단한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요리는 달짝지근한 요리가 많은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는 사쓰마가 도쿠가와 막부 성립 직후 류큐국을 침공해 식민지로 삼은 뒤 흑설탕을 대량재배해 본토에 유통시키며 막대한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키나와는 전통요리의 주재료가 고구마가 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해야 했으며, 오늘날에도 홀로 주일미군기지의 대부분을 떠안으며 일본 내의 식민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얻은 재원은 개항이후 서양세력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무기와 기계를 구입해 선구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 – 양이의 불길이 타오르던 찰나     

나마무기 사건 (1962)

발빠르게 서양과 접촉해 변화를 시작한 사쓰마.

그러나 어찌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혼자 깨어나서 돌아다니려던 사람에게 변이 없으랴.

1962년,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는 호위단과 함께 이동 중 영국상인 무리를 마주친다.

예법에 따르면 상인들이 길 옆으로 피해줘야했지만 눈치없는 영국상인은 어떻게든 슬쩍 지나가보려다가 행렬에 끼어들게 되었고 분노한 사무라이들에 의해 피살되는데 이를 ‘나마무기 사건’이라 한다.

이에 영국공사관은 무력행사를 결정, 7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파견한다.

사쓰마는 이에 대항해 선제포격을 하였으나 결국 10곳의 해안포대가 모두 파괴되고 시가지와 가고시마성까지 포격당해 화재가 나는 끝에 휴전협정을 맺게 되는데 이를 ‘사쓰에이 전쟁’이라 한다.     

시모노세키의 해안포대를 점령한 연합군

사쓰에이 전쟁은 좋게 봐줘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뛰는 법.

저번 화의 마지막에 안세이 대옥으로 요시다 쇼인이 자살골(?)을 넣어 참수당하고 주동자 이이 나오스케 역시 암살당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쇼인의 고향이던 조슈번에서는 비록 스승은 떠났지만 제자들이 그 사상을 받들어 존황양이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전 일본 양이지사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들은 (온실 속 화초이던) 천황을 살살 꼬드겨 막부에 압박을 가한다.     

결국 186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에 상경해 고메이 천황 앞에서 양이의 맹세를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심지어 언제 공격을 시작할 거냐는 반대파들의 추궁에 날짜까지 5월 10일로 못박아 버린다.

그리고 5월 10일, 예정대로 막부의 포는 불을 뿜었을까?     


사실 막부도 조정도 지금 일본의 실력으로 서양국가들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맹세도 천황측의 ‘막부 길들이기’에 가까운 정치적 쇼였을 뿐이고 천황과 막부 모두 나름의 이득을 얻었으므로 이렇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못읽고 혼자 폭주하는 번이 있었으니, 바로 죠슈번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행동하지 않는 막부를 비웃으며 서양과의 주요 무역로이던 시모노세키 해협에 포대를 세우고 지나가던 서양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분노한 서양국가들은 즉각 보복조치를 실행했다.

우선 미국은 와이오밍함을 파견하여 보복하게 했는데, 이 한 척의 배에게 조슈군이 가지고 있던 네 척의 함선은 힘도 못써보고 침몰당하고 자랑이던 해안포대들까지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뒤에도 프랑스 함대의 지원을 받는 해병대원들이 상륙해 포대 점령 퍼포먼스를 하는 굴욕 끝에 조슈는 항복...하는 듯 했지만 이래저래 뻗대며 봉쇄를 지속한다.

결국 1864년 진심으로 분노한 서양이 연합함대와 5000명에 이르는 원정대가 상륙하자 사흘 만에 항복하게 되고, 이를 ‘시모노세키 전쟁’이라 부른다.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은 모두 패배한 전쟁이지만 두 번은 이를 통해 재래식 전력으로 서양세력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두 번은 양이의 입장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자신들만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이처럼 막부 말 각 번이 주체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점도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삿쵸동맹의 결성 – 유신지사 어밴저스     

죠슈번 키헤이타이의 재현행렬.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인 것일까?

죠슈의 폭주로 일어났다가 죠슈가 두드려맞으면서 마무리 된 시모노세키 전쟁.

서양열강들의 연합함대도 파견되면서 인적물적 소모가 극심한만큼 죠슈는 300만 달러의 배상금과 시모노세키의 개항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죠슈는 우린 그런 거액을 지불할 능력도 없고 우리의 공격은 막부의 (영혼없는) 명령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었다고 ‘배째라’를 시전한다.

막부 내부사정을 잘 모르던 서양열강의 입장에서도 중앙정부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합당한 처사.

결국 뒤처리는 옆에서 구경하던(?) 막부가 뒤집어쓰게 되어버린 셈이다.

여기에 죠슈는 막부의 허락도 없이 시모노세키항을 개항해버리고 외국과 적극적인 교역을 시작하며 사쓰마와 함께 부국강병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연히 죠슈의 이러한 처사는 막부 입장에서 보면 천하의 역적이다.

게다가 이젠 죠슈마저도 손을 놔버린 양이파들이 동탁처럼 천황을 확보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던 ‘금문의 변’까지 일으키면서 결국 대대적으로 죠슈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죠슈는 아연실색하였고 결국 최고위 중신들이 할복하고 급진파들을 다 쫓아낸 뒤 항복하면서 가까스로 막부군의 발길을 돌린다 (1차 죠슈정벌).     


그러나 이미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봐버린 죠슈인들이 이렇게 포기할 리 없지.

가까스로 살아남은 토막파들은 서양무기와 편제를 이용한 비정규군 육성을 계획하고 그 책임자는 쇼인의 제자, 다카스기 신사쿠가 맡는다.

이 군대는 키헤이타이(기병대, 奇兵隊)라 불렸는데, 한자에서 보듯 기이한 군대라는 뜻이다.

무엇이 기이했는가?하면 무사와 농민이 함께 편성되었다는 점인데, 전국시대 이후 도쿠가와 막부 내내 농민들은 무기를 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나폴레옹 이후 근대국민군의 특성 아니겠는가.

이듬해인 1865년 죠슈번 내전에서 보수파의 번군을 격파하면서 키헤이타이는 그 진가를 발휘했고 다시 토막파가 정권을 잡게된다.     

삿쵸동맹의 세 주역. 가운데가 사카모토 료마, 왼쪽이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른쪽은 죠슈의 가츠라 코고로 (훗날의 기도 다카요시)

당연히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막부, 이번에야말로 멸번을 시키겠다며 다시 토벌군을 조직한다(2차 죠슈정벌).

그러나 사정은 1차정벌과는 사뭇 달랐으니, 죠슈 자신도 서양무기로 무장한 키헤이타이를 보유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이번엔 동맹까지 생겼으니 바로 사쓰마번이다.

사쓰마는 1차정벌 당시 막부군측에 서서 죠슈와 싸운 적이 있지만 이미 사쓰에이 전쟁 이후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내심은 토막파로 돌아서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카모토 료마라는 젊은 사무라이의 중재로 삿쵸동맹이 이루어지게 되고, 사쓰마 없이 단독으로 진격한 막부군은 키헤이타이에게 연패를 거듭하다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2차정벌은 실패로 끝난다.     


대정봉환의 실패와 보신전쟁 – 막부의 멸망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2차 죠슈정벌의 실패는 일본 전체에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방정부를 통제하지 못하는 중앙정부와 지방군에게 참패당한 중앙군이라는 이미지는 바야흐로 막부의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신호가 되기에 충분해보였다.

그런데 새로이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장의 수를 썼으니, 바로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

말 그대로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고 막부의 문을 닫겠다는 충격선언인데, 왜 요시노부는 이런 자살볼을 찬 것일까?

보신전쟁 당시 신정부군의 재현행렬. 가운데의 빨간 깃발이 금어기이다

사실 요시노부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미 천황이 정치에서 손을 뗀지도 근 천년인데 이제와서 천황과 귀족들이 일본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결국 다시 막부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공식적으로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정치를 한다는 빅픽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세를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일까. 

신정부 수립일인 1868년 1월 3일, 천황의 밀명을 받은 사쓰마군이 무력으로 쿠데타를 감행해 교토황궁을 점거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한다.

바로 이 사쓰마군의 총사령관이 당시 40세이던 오늘의 주인공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에도성 무혈개성을 협의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츠 카이슈

사이고의 주도로 신정부는 전 쇼군 요시노부의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반납할 것을 결의한다.

이에 막부 역시 사쓰마 정벌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교토를 봉쇄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보신(戊辰)전쟁의 막이 오른다.

그러나 숫적우세와는 달리 교토로 향하는 도바-후시미 가도에서 벌어진 초전에서 막부군은 참패하면서 전쟁은 빠르게 성패가 정해져버렸다.

결국 개전 반년만인 1968년 7월, 에도성까지 진격한 신정부군에게 막부의 육군봉행이던 가쓰 가이슈가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을 지어 무저항으로 에도성을 비워주며 막부는 비교적 조용히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막부 말 막부군의 모습. 화승총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군과는 한참 달랐다

여담이지만, 보신전쟁이 너무나 신속하고 허무하게 끝났고 막부말을 다룬 미디어(바람의 검심이라던가...)들의 영향으로 당시 막부군이 무슨 총기로 무장한 정부군 앞에 발도돌격이라도 한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막부 역시 개항 이후 육군은 프랑스,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삼아 군제개혁을 이어왔고 실제로 막부군과 정부군의 무장은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해군은 막대한 자금이 드는 만큼 막부의 수준이 압도적이었고, 당시 해군 부총재이던 에노모토 타케아키가 온존된 막부함대를 이끌고 홋카이도로 가 일본 최초의 공화국인 ‘에조 공화국’을 세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막부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정부군이 앞세운 천황을 상징하는 금어기(錦御旗)로써 이를 본 막부군은 ‘우리는 진짜 역적이 된 것인가?’란 생각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하니 심리전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과 이와쿠라 사절단 – 엔딩 이후의 세계     

메이지 유신 (1868)

이로써 막부는 막을 내리고 사쓰마와 죠슈가 이끄는 메이지 정부의 치세가 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녹록치 않았다.

앞서 대정봉환에서 요시노부가 예견했듯 신정부의 인물들은 의욕은 넘치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양을 따라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생각은 좋지만 정작 서양 문명과 제도에 대해 박식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의 지상과제는 크게 불평등 조약의 개정과 재정 정상화였다고 할 수 있다.

조약에 포함된 개항과 관세협의(관세는 외국과 상의해 결정), 영사재판권(외국인의 범죄는 외국영사가 재판함) 등의 조항은 (막부가 멋모르던 시절에 찍어놓은) 열강들의 최혜국 대우(다른 나라와 더 좋은 조약을 맺으면 우리에게도 자동 적용)와 맞물리며 물심 양면으로 고통을 주고 있었다.

또 신정부는 폐변치현을 통해 일본 열도의 통치권과 조세권을 넘겨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번들의 부채와 사족들의 생계문제도 떠맡게 되었다.

새 시대에 유학과 전쟁밖에 모르는 사무라이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임진왜란 때도 그랬듯 넘쳐나는 무사들은 일본사회의 새 불안요소가 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화려한 위용. 가운데의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정부 수립 3년 뒤인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발했다.

사절단의 중심인물로는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이 있었다.

이 중 이와쿠라 도모미는 구 조정 귀족출신으로 얼굴마담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너무 잘 아니까 넘어가자.

나머지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가 각각 사쓰마와 조슈 출신으로, 사이고와 함께 메이지 유신의 중심을 이룬 유신삼걸이다.

즉 당시 최고실세가 두명이나 포함되어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절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2년에 걸쳐 총 12개국을 돌아다니며 서구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개정여부를 타진하고 구미열강의 문명과 사회를 시찰하게 된다.

이 중 불평등 조약의 개정은 당연히(?) ‘일본에 근대국제법이 없어서 안된다’는 둥 갖은 핑계로 실패하게 되지만 구미열강 시찰에 대해서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 때 헌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후 영국과 독일에 유학까지 하며 공부하여 일본 초대헌법과 내각제의 초안자가 된다.     


정한론 정변 – 심심하면 조선정벌?     

정한론 정변 (1873). 모두의 표정이 심상찮다

그런데 유신 삼걸 중 두명이 사절단으로 갔으면 일본 국내정치는 누가 하고 있을까?

당연히 사이고 다카모리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여태 보았듯 근본적으로 사이고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이었기에 인기는 높았지만 실질적으로 정부를 이끌어갈 능력은 없었다.

애초에 당시 정부 실세이던 오쿠보가 동향친구인 사이고에게 정치를 맡긴 것도 중대한 국사결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상유지만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잠하던 사이고, 그의 운명을 가를 큰 사고를 치고 만다.     

1872년 부산진의 지도

정부수립 이후 제일 처음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바로 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섰음을 알리고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다.

앞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조약개정 문제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과 전통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 역시 통상요구를 담은 메이지 천황의 국서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보다 강경한 쇄국파이던 흥선대원군이 지배하던 시절.

이미 왜관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뭐하러 추가적인 개항과 통상을 하겠는가?

또한 국서에 써진 ‘천황’이란 표현은 중화사상에서 용납할 수 없는 단어였기에 조선은 이를 문제삼아 수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불길이 번져가기 시작한다.     

앞서 사쓰마와 죠슈 모두 존황양이로 출발했다가 서양에게 두드려맞은 후 개혁파로 입장이 바뀌었단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사이고는 그의 동상처럼 우직한 인간이었는지 신정부에서도 사족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이끄는 보수적인 견해를 지지했다.

이 과정에서 완전히 개혁파/현실파로 방향을 튼 죽마고우 오쿠보 도시미치와 점점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또한 신정부는 개국초기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갑자기 세상이 변해버린 동료 사족들은 가난에 고통받고 있었다.

자연스레 불만이 쌓이던 상황에서 조선의 국서수령 거부는 건방진 행동으로 비춰짐과 동시에 분노의 분출구가 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이 그랬듯) 조선을 정벌해 개항시키자’는 정한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한론의 선구자가 요시다 쇼인이었다는 점에서 보수양이파들의 정한론 주장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담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사회 내부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한반도로 시선을 돌려 불만을 잠재우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극우파의 득세 역시 일본경제침체 장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회의에서 항의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문제는 우리가 기억하는 청일전쟁/러일전쟁 이후의 일본군과 달리 신정부군은 허약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

육군은 사쓰마와 죠슈의 번군이 주축을 맡고 있었고, 특히 해군은 앞서 말했듯 막부군의 전함하나 잡지 못할 정도로 빈약했다.

게다가 돈이 없어서 사족들 처우도 자꾸 열악해지는데 무슨 전쟁을 벌이겠는가?

그대로 끝났다면 오늘날 극우유튜버들처럼 그들만의 잔치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이고 다카모리, 난데없이 정부회의에서 정한론을 들고나왔다.

그는 조선에 외무성 하급관리가 아니라 거물급 인사를 보내서 강경하게 요구해야 하며, 그 사신으로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주장했다.

만약 조선이 분을 못참고 자신을 처형한다면 이를 명분으로 조선을 정벌하라는 것이다.     

오쿠보 도시미치 동상. 고향 가고시마에 있지만 사이고에 비해 별 인기가 없다고 한다...

이는 당연히 해외방문 중이던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보고되었고, 그는 해외일정을 중단한 채 황급히 귀국한다.

당연히 오쿠보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는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기로 약조해놓고 왜 어겼냐고 따졌고 또한 구미열강과 불평등 조약 철폐같은 중대한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과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맞섰다.

둘 간의 논쟁은 각자는 물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자신의 직을 걸고 맞서는 대규모 정쟁으로 발전하였으나, 결국 메이지 천황이 사이고의 사표를 수리하고 오쿠보와 기도의 사표는 반려하면서 오쿠보의 승리로 끝났다 (정한론 정변).

이윽고 사족 사이에서 인망높던 사이고를 따라 정부와 군의 인원들이 대거 사표를 내고 귀향하였는데 그 수가 3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쿠보는 빈자리를 황급히 채우면서 내각을 공고히 하였고, 이로써 사이고는 정부에서 모든 영향력을 잃게 된다.     


정한론 정변은 후대의 한국인에게 제2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꿈꾸던 정신나간 사이고를 착한(?) 오쿠보가 막아준 사건처럼 보이기 십상이지만 여기서 보듯 그 본질은 신정부를 이끄는 신진개화세력(오쿠보)과 보수양이세력(사이고)의 정치싸움이었다.

그러나 정말 조선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은 아닌데, 오늘날의 우리사회도 힘들어지는 경제사정에 박통을 그리워하는 할배들이 있듯, 사족들의 입장에서 조선정벌은 점차 쪼들려가던 생활을 단박에 역전시켜줄 로또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쿠보를 비롯한 메이지 지도부 역시 제국주의 열강에게 불평등 조약으로 손해를 보면서 식민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기에 조선정벌 역시 ‘지금은 아니야’ 수준에서 반대를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결국 요시다 쇼인의 ‘뇌피셜’에서 사이고의 ‘정한론정변’까지 조금씩 정한론은 현실성을 띠어가고 있었고, 1880년대의 이토 히로부미 내각 이후 일본경제가 정상화되고 부국강병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정한론은 ‘할까?’보다 ‘언제? 어디서?’로 요점이 변해갔다.

또 이때 사이고와 함께 하야한 사쓰마 사족들은 재야에서 헌법제정과 국회설립을 부르짖는 ‘자유민권운동’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들이 점차 조선침탈의 주역으로 흑화해가는 과정은 다음시간에 살펴볼 것이다.     


세이난 전쟁 – 육군대장 세고돈의 최후     

육군대장 정복차림의 사이고

비록 정치에서는 물러나 낙향했지만 그 인기가 어디가겠는가.

가고시마에서 사이고는 그야말로 영웅대접을 받았고 현의 허가를 받아 사족들의 교육을 위한 사학교들을 세워 사무라이들에게 실용학문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듯, ‘인기있는 전 정치인이 은퇴 후 만든 새로운 조직’은 현 정부에게 극도의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족들의 봉록지급에 부담을 느낀 정부가 1876년 ‘봉록을 퇴직금으로 퉁쳐 채권으로 전환한다’는 질록처분을 발표하였다.

쉽게 말해 연금 10년치를 퇴직금이라고 싸잡은 다음 강제로 채권으로 바꾸고, 이에 따른 이자만 지급한 것으로, 그 수입은 대략 평범한 노동자 연봉의 1/3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사무라이들의 칼 휴대를 금지한 폐도령까지 시행되며 구 사족들의 불만은 쌓일대로 쌓여갔다.     

이에 1870년대 중반에는 사이고와 함께 낙향했던 에토 신페이가 일으킨 사가의 난, 죠슈의 쇼카숀수쿠 출신들이 일으킨 하기의 난 등 전국에서 사족반란이 잇따랐고, 사이고를 향한 무언의 압력도 거세지고 있었다.

세이난 전쟁 중 구마모토 성 전투

당연히 신정부 역시 군경을 파견해 사이고와 사학교 일당의 동향을 감시하던 중 1877년, 일이 터지고야 만다.

사족들이 사이고 주변에서 수상한 자를 붙잡아 심문하였는데 이 자가 자신은 정부의 밀정이며 사이고 암살의 밀명을 받고 왔다고 자백해버린 것.

이에 사쓰마의 사족들은 사이고 주변으로 집결하여 결단을 종용하였고, 사이고 역시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하면서 세이난 전쟁의 막이 올랐다.     

구마모토성의 천수각

그러나 기세와 달리 전쟁경과는 영 신통치 못했다.

이들 반란군의 첫번째 목표는 규슈의 중심 구마모토에 위치한 구마모토 성이었다.

이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 당시 침공군의 사령관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지은 것인데, 그가 조선에서 임시로 구축한 왜성이 정유재란 내내 일본군의 교두보 역할을 했을 만큼 축성의 달인이었다.

게다가 반란을 우려한 신정부군이 최신무기를 미리 규슈 밖으로 다 빼돌려 무장상태 또한 빈약했다.

결국 구마모토성은 외부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2달동안 막아내었고, 마침 이즈음 깔린 우편망을 통해 토벌군이 신속하게 조직되어 파견되면서 반란군은 공성을 포기하고 도주하게 된다.

그리고 1877년 9월, 신정부군에게 포위당한 사이고가 할복하면서 세이난 전쟁은 1년도 안되어 막을 내리게 된다.     


유신삼걸 중 죠슈의 기도 다카요시는 사이고에 앞서 1877년 5월 병사하였는데, 유언이 “이제 그만 좀 하지, 사이고...”였다고 한다.

나머지 한명 오쿠보 도시미치는 세이난 전쟁 1년 후,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이로써 유신삼걸로 대표되는 화려한 유신 1세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2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니 바로 이토 히로부미 되시겠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유산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 양반의 주권선/이익선에 비하면 사이고의 정한론은 양반이다.

세이난 전쟁은 허무하였지만 메이지 정치사에 중대한 영향을 한가지 끼치게 된다.

앞서 메이지 유신 당시 육군의 주력은 조슈와 사쓰마의 번병들이었으며, 이들이 신정부 설립 이후에도 본격적인 국민개병제 시행 이전까지 정부군을 맡게 된다.

그러나 사쓰마측 세력은 정한론 정변 때 사이고를 따라 대부분 낙향한 후 세이난 전쟁에서 반란군으로써 산화한다.

여기에 ‘반란군의 고장’이라는 딱지까지 붙으면서 육군의 주도권은 조슈번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며 그 대표 인물이 일본제국육군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이다.     

동생 사이고 주도. 타이완 침공의 주역이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는 비록 반란수괴였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라는 공 덕분인지 사후처리가 심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다카모리의 동생 사이고 주도는 정한론 정변 당시 형과 달리 낙향하지 않고 정부에 남았는데 1874년 타이완 침공 당시 일본군을 이끌기도 했고 오쿠보 암살 뒤에는 육군경, 1898년 최초의 해군원수까지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이렇게 육군은 조슈벌, 해군은 사쓰마벌로 갈린 것은 훗날 일본 헌법의 구멍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군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며 일본이 제국주의로 들어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렇듯 메이지 정부 초기의 역사와 함께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사이고 다카모리.

정한론 때문에 한국인에게 결코 곱게만 비춰지지는 않는 인물이지만 그의 우직한 일생은 일본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는지 오늘날의 일본사극에서도 후덕한 모습의 그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다음 시간에는 메이지 초기의 혼란을 정리하고 일본헌법과 의회제도를 만든, 그와 동시에 헌법과 의회를 반쪽짜리로 만들어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싹을 만든, 어쨌거나 명실상부한 일본헌정의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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