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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May 08. 2024

'싱크족(SINK)'과 '정당한 삶'

아이 없는 전업주부: 정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


에라이 뛰어내려


'정당한 직업을 갖든지, 아기를 낳든지'



 장손의 큰 딸이라고 손자손녀 중에 나를 애지중지 가장 아끼던 할머니의 말씀이다.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대학교를 갔다는 것만으로도 늘 장하다, 잘했다 하시며 하고싶은 일 열심히 하라시던 할머니는 이제 한창 결혼 준비 중인 손녀딸이 일생일대 통틀어 가장 답답하신 모양이다. 자꾸만 노인정에서 점심 지날 무렵 전화하시는 걸 보면, 그 한숨의 무게가 무형의 전파로도 전해지는 것만 같다.


 나는 사실 싱크족이다. '사실'이라거나 '솔직히 말하자면'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나는 나를 어쩐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멀쩡하게 대학 졸업해서 사지가 멀쩡하다면, 당연히 취직해서 커리어를 쌓고,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거나, 아주 많이 봐줘서(?) 적어도 둘이 일하면서 아이가 없는 딩크족으로 살아야한다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없는데 직업도 없다고? 그냥 놀아?"라는 질문이 당연히 따라온다.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은 이제 어느 정도 사회적 선택지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 같다. 남녀평등과 물가 상승의 오묘한 콜라보레이션으로, 아이를 낳지 않고 둘이 재미있게 살겠다는 '딩크족'이 늘어나고 있다.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지에 오르지 못했던 소외된 사례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를 낳지 않고 둘이 재밌게 살겠다'는 것 = 딩크족 > 을 의미한다는 건 또 다른 폭력이다. 다른 가능성을 또 한번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도 일을 하지 않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생산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죄악으로 평가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하지 않았던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하지만 여기서 '일'은 무엇인가? 일용할 양식을 획득할 수 있는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의 일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하고 추구하는 일의 전부일까? 그게 아니면, 인간의 위대한 목적인 종족 번식을 위해 자손을 생산하고 그 생산물을 돌보고 기르는 것만이 '일'인가? 정말, 그게,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의 전부일까? 글쎄, 나는 내 인생으로 하나의 실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생산성, 일, 돈, 가정, 가치에 대한 새로운 정의 말이다.




 계약직으로 회사를 다니며 불안장애와 공황을 겪고, 불면증으로 시달리며 아침마다 '그냥 교통사고나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달고 다녔다. (이것은 우울증의 증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정상적 생각이 아닙니다..!) 상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숫자로 빼곡한 엑셀 파일을 쭟기듯 검산하고 틀어진 수식들을 고치며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화장실로 달려가 자꾸만 얕아지는 숨의 끄트머리라도 잡으려고 구석에 주저앉아 가슴을 쳐댔다. 이러다 큰일나겠다는 생각으로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 뒀다. 그 후 주저 앉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일들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늘 아쉬웠고, 붙은 회사가 있어도 이전 직장생활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도저히 입사할 수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반려인과의 긴 대화 끝에, 나는 구직 활동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만큼 노력했는데도 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도 컸지만, 10여개의 직장을 다니면서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나에게 '회사'라는 시스템이 맞는 것인지 회의감이 더 크게 들었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로 영상 작업을 하는 퐁당퐁당 백수가 되었다.


 그 후 나를 계속 괴롭히는 말은 바로 우리 할머니의 말이었다. '정당한 직업'에 대한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나는 정당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 나는 멀쩡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스스로를 더 숨게만 만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프리랜서 작업 일이 있었기에 '프리랜서'라는 방패 뒤에 숨어 얕은 숨을 겨우 쉴 수 있었다.

 


 

'정당한 삶'은 무엇일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딩크족'이라는 발표를 하는 데에 큰 죄책감과 '정당하지 못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나 또한 여전히 가족들에게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 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지만, 회사를 들어갈 생각도 없다는 말은 대체 어떻게 하겠는가. 과격한 표현이지만 '뚫린 입'이어도 도저히 자신있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심한 인간으로 볼 것 같은 그 눈초리가 두려워서다.


 나는 싱크족으로 부당하게 살고 있는 걸까? 난생 처음 '싱크족'이라는 라벨링으로 소수자가 되어보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편견으로 빠르게 판단하고 처벌하는지 알게 됐다. 특히 '아이 없는 전업주부'라는 말로 검색하면 무수히 많은 자괴감의 한숨과 멸시의 타박이 가득했다. 그냥 남편 뜯어먹는, 빨아먹는 거냐, 생각 없이 기생하는 것들이라는 모욕적이고 혐오적 말들이 끝없었다. 나도 바로 이런 사회적 시선이 두려워서 점점 움츠러 들고 숨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사회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어거지로 어디든 들어가서 밥벌이를 하는 것, 나에게 더는 가능성이라고는 없다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꾸준히 주눅들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어딘가 직장을 들어가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둘 다 거부하고 싶다. 그것이 솔직하고 정확한 나의 마음이고, 나는 스스로 내 인생을 결정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나는, 우리 모두는 그래야 한다.




 단 한 명만이라도 나의 편이 되어 준다면,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반려인은 나의 이런 생각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들어주었고, 나의 이런 인생 실험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물론, 나 또한 이 기회를 잘 잡아서 반려인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하고 싶을 때 어떻게든 지지해줄 수 있는 반려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둘의 삶에 위협이 될 정도로 금전적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식으로든 생업 전선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럴 마음의 각오는 충분히 하고 시작했다. 지금 나의 목표는 내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반려인과 함께 사는 내 가족의 주체성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싱크족'을 다양한 가정의 한 형태로 봐줄 수 있는 사회적 시선을 기다린다. 내가 남기는 기록이 큰 힘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게 뭐 큰 역할이 되겠나 싶은 회의감이 동시에 든다. 하지만 내가 근 2년간의 싱크족 생활을 하며 배운 큰 교훈은, 기록은 마침내 힘이 된다는 것이다. 자잘하지만 매일 같이 적어내려간 '매일 생활일지'는 내가 스스로의 당당함과 정당함을 회복하는 데에 가장 큰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따라서 나는 적기로 했다. 주눅들어 있는 어느 사람들에게, 과거의 나에게 '스스로 삶의 운전대를 꽉 붙잡고, 몰아라!'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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