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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행 2 – 약상자

by 김영근

올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이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체감온도가 -5도 F(섭씨 영하 20도)에 이르니 노약자들은 바깥출입을 삼가란다. 이런 추위가 사나흘 이어진단다. 예보의 호들갑 아니어도 바깥출입을 마다한 게 벌써 일주일이 넘어 열흘에 가까워온다. 여행 후 느닷없이 만난 아주 독한 감기 몸살 탓이다. 약 먹고 눕고를 거의 일 주간 이어오다 자리 털고 일어난 게 엊그제이다. 약하고는 그리 친하게 지내오지 않았던 터라 거의 일주일 동안 시간 맞추어 약을 먹는 일은 내겐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러다 생각난 철이의 거대한 약상자였다.


약상자


가히 19인치 노트북 크기만 한 거대한(?) 철이의 약상자를 본 것은 중미산 자연 휴양림 산장에서였다.


철이, 그렇다. 그의 이름은 김철이다. 몸크기가 나보다 족히 두 배는 될 건장한 청년 철이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그가 ROTC제복을 입고 있었던 대학생 때였다. 그리곤 지난 12월에 다시 만났으니 그 사이 사십 오륙 년은 족히 지났을게다. 비록 한 해 후배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던 철이의 맏형 김추를 보는 듯했다.


터무니없이 세상을 일찍 떠난 김추네와는 한 골목에서 제법 오래 살았었다. 터울이 지는 철이와는 크게 함께 한 시간은 없었어도 수십 년 만에 만난 얼굴이어도 옛정들이 되살아나던 것이었다.


이번 한국여행의 첫 번째 이유는 내 고향 신촌친구들과 어릴 적 함께 고백했던 신앙의 뿌리를 새겨보며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를 되뇌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여 그 시절 친구들 얼굴을 많이 보았다. 그중에 철이는 막내 격이었다.


그런 그가 자원해서 준비했던, 중미산 자연 휴양림 산장에서 하룻밤 머물며 수십 년 만에 만난 벗들이 이야기 한 자락 맘껏 늘어놓은 자리였다.


덜렁덜렁 쫓아갔던 나는 미처 몰랐었다. 휴양림 산장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철이가 준비해 왔던 짐을 다시 꾸리기까지, 그가 그날을 위해 얼마나 애썼던지를. 그의 차를 한가득 족히 메운 각종 짐들은 그 산장에서 함께 했던 우리 친구들이 한순간이라도 불편함과 부족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그의 애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방 한 구석에 꽂혀 있는 그의 거대한(?) 약상자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오랜 투병생활의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 그의 완쾌 소식이다.


이번 여행 중에 만난 몇몇 벗들 역시 병과 씨름하고 있었다.


살며 몸과 맘에 병 없이 사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만, 바라기는 몸의 약이던 맘의 약이던 오늘 살아 숨 쉬고 있음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기를 나 스스로에게 빌며.


다시 새겨보는 막내 철이에 대한 깊은 감사로. (환조 목사님과 친구 병덕이의 애씀에 대한 감사는 덤으로 하고)


*** 철이에게 약상자가 더는 필요없게 되었다. 겨울이 이제 물러가나했던 지난 3월 16일 그의 부음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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