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걷는 길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있던 긴장이 풀어지며 날개 젖은 나비마냥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들어오고, 해야 하는 일들이 급격히 쌓이면서 체력은 완전히 바닥났다. 심지어 아직 본격적이지도 않은 상태인데, 심리적으로 긴장이 팽팽 해져서인가보다.
진이 빠진 상태에서 남매인 아이들을 재울 때면 도무지 잠을 이기기가 힘들다. 이대로 10시에 아이와 함께 잠들어 버리면, 건조기 안에서 이제 막 말려진 빨래를 갤 시간이나, 드라마에 요아정을 곁들여 남편과 이야기 나눌 조금의 여유도 없이 하루가 끝나버린다.
그게 싫어서 보통 릴스에 내 뇌를 각성시키며 잠을 쫓는데, 요즘엔 텍스트면 좀 죄책감이 덜 할까 싶어 깔아본 게 스레드다. 스레드도 처음엔 재밌다가, 계속 들여다보니 극한의 사랑과 극한의 혐오가 혼재된 극단주의자들의 집합소라 그곳의 글들도 피로해서 이것도 지워야지, 하는 찰나 이런 글이 보인다.
성인 된 후에 남매 장점 자랑해 주세요
남매 엄마 말고 남매 직접 등판 부탁드립니다
재밌겠다 싶어 댓글을 둘러보는데, '부모님 장례식 하게 되면 의논할 놈은 하나 있다는 거'가 3천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그 외 각종 드립들 모두 '그런 거 없다'가 태반이다. 막상 웃기지가 않고 너희들은 참 좋겠네. 대세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 들어 나도 댓글을 얹었다.
엄마 아빠가 힘든 사람이면, 이 세상에 그거 아는 동지는 내 동생 하나밖에 없음. 내 마음 100퍼센트 이해해 주는 사람 딱 하나, 내 남동생임. 걔가 나 살리고 나도 걔를 살림.
예전에 나는 의부증의 부가 '아버지 부'를 동반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 의부증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말은 우리가 설명하는 방식 그대로 아빠의 귓바퀴에 닿지 못하고 그가 생각한 저의에 따라 해석되었다. 하루는 동생이 고2였을 때, 아빠는 독서실에서 동생이 공부를 하고 있는지 감시를 하러 간 날이 있었다. 그때 그는 하필 친구들과 잠시 떡볶이를 먹으러 간 사이였다. 동생의 부재를 확인한 아빠는 그의 행적을, 나아가 그의 전부를 왜곡하며 다그쳤다.
"이 새끼야 공부한다는 새끼가 거짓말하고 어디 갔었어. 바른대로 말해. 니 같은 놈이 뻔하지."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는 그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디 갔었는지 똑바로 말해라" "이때까지 독서실에 간 적 없제? 버러지 같은 새끼." "바른대로 실토해라. 이때까지 독서실에 제대로 간 적은 있냐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던 옛날 형사처럼 아빠는 동생을 때리며 고문하듯 물었다. 맷집이 좀 커진 동생은 꿈쩍도 않고 끝까지 자기 답을 지켰다. 난 떡볶이를 먹으러 갔었다고, 그 잠깐일 뿐이었다고.
22시부터 시작된 매질은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그쯤 돼서는 사실의 진위확인보다는 아들의 굴복이 필요한 거였을 것이었지만 동생은 끝내 지지 않았고, 아빠는 교과서를 다 불태울 테니 학교도 다니지 말라며 윽박지르곤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동생은 맞은 데가 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분신한 사람처럼 몸을 던지며 울었다. 무수히 반복되던 날들 중 하나였는데, 그날은 동생이 갖고 있던 어떤 한계, 인내의 역치가 새벽을 통과하며 넘어 버린 거였다.
속에서 터진 울음이 한참 이어지더니, 동생은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니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 나는 너의 마음을 전적으로 다 안다며 그의 등을 쓸었다. 그러나 명치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동생의 분노 앞에서 내 말은 너무도 연약했고 다른 방도가 필요하다는 걸 직감했다. 일단 이 애를 재워야겠다. 나는 집에 박혀 있던 독주를 꺼냈고, 언젠가 그런 독주를 먹었을 때 식도를 따라 타들어가는 알코올의 푸른 불씨 같은 감각을 떠올렸다. 이거면 될까, 소주잔에 한 잔 따라 약을 먹이듯 동생의 입에 부어 주었다. 가슴이 차갑게 꺼뜨려졌는지 그는 다행히 깊은 잠에 들었다.
그런 전쟁 같은 날들이 끝도 없이 지속되었으므로, 우리 남매의 우애는 전우애와 다름없었다. 이 세상에 저 사람을 아빠로 두고 있는 건 우리 둘 뿐이라는 것. 그 외에 어떤 타인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우리 만의 연대는 아빠가 아우성칠수록 더 돈독해졌다. 그렇다고 아빠의 난장에 우리가 같은 방에 있거나, 번번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 똑같은 이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누군가가 지붕아래 한 명 더 있다는 사실 자체로 위안이 되었고, 가끔은 저렇게 서로를 구해주었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동시에 고꾸라진 적이 없었고, 번갈아 근근이 서로 일으켜주며 독립할 날만을 고대했다.
5살 차이로 꽤 터울이 졌던 동생은 음악을 들을 때 내가 PC로 다운받았던 mp3파일을 그대로 옮겨 들었다. 나도 그리 독특한 취향은 없어서 당시 top 100. 같은 걸 자주 받아두었고,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가진 우리는 동시에 좋아하는 노래가 두어 개 생기곤 했다. 가끔 집에서 어떤 노랠 내가 흥얼거리고 있으면 동생은 자연스레 목소리를 얹어서 함께 불렀는데, 노래 끝에 다다르면 둘 다 장난스럽게 열창하며 마무리하곤 했다. 별것도 아닌 합창이 약간의 유쾌함과 만족감을 주어서 은연중에 그 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밤길, 왕복 3차선 도로의 인도를 동생과 함께 걷던 날의 노래가 떠오른다. 왜 거길 걸었는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하필 그 밤에 차는 지나가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라 인도 옆은 야트막한 벽이었고, 그 위로나무들이 줄지어 있어서 밤인데도 녹색빛을 띠었다. 1km 넘게 뻗은 그 길이 유독 끝이 없는 것처럼 넓어 보였고, 그곳에 우리 밖에 없다는 사실이 독특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 해방감을 누리고자 우리는 자연스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함께 좋아하던 김사랑의 위로라는 노래를. 평소처럼 하나가 흥얼거리면 거기에 목소리를 얹는 식으로.
낮고 좁은 빌라 20평 남짓한 집에서 노래를 부를 때랑은 차원이 달랐다.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우리가 소리를 드높일수록 그곳은 우리 둘의 음성으로만 가득 찼다. 목이 터져라 부른 뒤 노래가 끝났을 때의 그 장소의 고요함에서 메아리가 쳤다.
'이 괴로운 우주에 우리 둘 뿐이야, 여기 우리 둘 목소리뿐이야, 근데 둘이어서 다행이잖아, '
나는 그때 크고 작게 치유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애에게 많은 걸 받았다.
전우애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걸 커다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이 깊고 커다란 사랑을 사랑이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재우고 있는 이 두 아이들은 서로의 입에 독주를 부어줄 일이 없기를 바란다. 새까만 밤길에 노래를 부르며 위로받을 일이 없기를, 집 앞 할로겐 등 아래서 서로를 기다리며 서성일 일이 없기를. 그저 시시껄렁한 얘기나 나누며 달콤한 요아정이나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다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