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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light Dec 16. 2018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의식과 메모리 반도체 왕국의 탄생

[북앤톡]강기동과 한국반도체를 읽고 

삼성전자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게 된 건,  80년대 고 이병철 회장이 미래를 대비해 대담하고 과감하게 투자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아직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한국 최초의 반도체 회사인 한국반도체를 설립하고 우여곡절끝에 회사를 삼성에 매각하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강기동 박사가 쓴  자서전 '강기동과 한국반도체'를 보면 삼성이 메모리리 올인하는 카드를 뽑아든 것 현대그룹과의 라이벌 의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라이벌 의식이 메모리 반도체라는 불확실한 판에서 오기에 가까운 경쟁을 불러왔고 이게 뜻하게 않게도 한국이 세계 최강의 메모리 반도체 국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강기동 박사는 한국반도체를 삼성에 매각한 후 삼성반도체 사장으로 2년 정도 근무했다. 합병후 파견된 삼성 임원들과 일하다 갈등이 불거졌고 모함을 버티다 못해 퇴사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해왔고, 책에서도 현대에 호의적이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강 박사가 책에서 언급한 내용은 한때 한국 재계의 원투펀치였던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었다.


책을 보면 메모리 반도체 올인 카드는 삼성보다 현대가 먼저 뽑아들었다. 정주형 회장은 강기동 박사를 현대전자 사장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될뻔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틀어지자 본인이 직접 총대를 매고 나왔다.


정주영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그 전해(1981년)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정 회장은 일본에서 초대한 마스시타 회장과 아남의 김향수 사장을 동반하여 세미나를 가진 후에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자리에서 마스시타 회장으로부터 반도체 사업 진출을 강력하게 권유받았는데, 전 대통령까지 이에 합세했다. 그래서 거기서 바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당시 전자공업 진흥 업무를 담당했던 송태욱씨의 말이다. 또 이종운 부장 말로는 현대는 덩치 큰 것만 잘하지 덩치가 작은 정밀 공급은 못할 거라는 일반의 인식을 뒤집고 정밀 산업에서도 삼성을 이길 수 있다는 재벌 총수의 자존심을 세우는데 반도체 사업에 딱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낙하산이란 단어를 여기에도 쓸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정주영 자신이 만든 낙하산 사업이었다. 난데없이 전자의 핵심 분야인 반도체에, 일본도 힘들어서 허덕이는 그 사업에 뛰어든건 다들 "어렵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하면서 정 회장은 전자 공급도 선발 업체인 삼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는 삼성처럼 국내 시장에서 쉽게 돈벌 생각은 없고 전 세계가 시장이라고 했다. 나하고 같은 생각이었다. 정 회장과 상당한 시간을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많은 사항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삼성이 이랬다면...'하는 아쉬움이 앞섰지만 지난일은 잊고 다시 앞날을 생각해볼 기회가 온것 같았다.


현대가 공격모드로 나오자 이병철 회장도 바빠졌다.


한편 삼성 이병철 회장은 현대의 전자 사업 진출 소문은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어려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리라고는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현대가 TV와 같은 민생용 전자는 건너뛰고 컴퓨터의 핵심 반도체 부품부터 만든다는 전략이 알려졌다. 게다가 강기동 박사의 현대전자 사장 취임은 백지화되었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해 정주영 회장이 직접 사장직을 맡았다고 하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되니 현대 정 회장에게 맞설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 회장인 자신이 직접 발 벗고 나서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반도체 전략 긴급 검토 명령이 내려졌다. 반도체는 자기네 영역인데 현대에 그냥 내줄수는 없다. 삼성도 반도체 관련 사업 검토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합작이나 기술 도입 형식으로 검토했지만 워낙 기술료가 비싸다보니 잘못하면 남 좋은 일로 끝날 것 같아 돌다리만 계속 두드리고 있던 상태였다.
혼자 한번 해보겠다는 현대의 정주영식 배짱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현대가 독자적으로 하겠다고 나온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삼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실리콘밸리를 찾아왔다. 반도체에 관한한 여기밖에 찾아갈 곳이 없다. 와서도 만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한국의 정보가 모두 나에게 몰려오고 간접적으로 자문을 요청하기도 한다.
1982년 11월 현대전자의 메모리 사업 계획서가 상공부에 접수되었다. 처음 계획한 날짜보다 좀 늦어졌다. 제품은 64K 디램으로 시작해서 미국과 한국에 동시에 공장을 건설하여 사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이병철 회장의 마음이 급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서둘러 1983년 2월에 우리도 메모리를 외치며 일본 동경에서 대형 반도체 신규 사업을 발표했다. 새로 땅을 사서 한국과 미국에서 시작한다는 현대의 사업 공식 그대로다. 현재에 지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기득권 영토를 침범당할 수 없다는 라이벌 의식에서 오는 재벌 총수의 오기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많은 삼성 참모들이 이건 아닌데 하며 어리둥절해했다. 몇몇 간부들은 좀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면서 조심스러워하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모든 사업을 상의하던 홍진기 회장에게는 발표 직전에 알리기만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주영 회장이 나도 정밀 공업하면서 엉뚱하게 반도체 메모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다급해진 이병철 회장이 네가 해? 그럼 난 더 크게 해"하면서 장군 멍군하고 나온 것이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이것이 반도체 메모리 왕국 신화의 진실이다.


카드를 먼저 뽑아든건 현대지만 카드로 재미를 먼저 본 건 삼성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주도아래 삼성은 현대보다 먼저 64K 메모리를 개발했다.


삼성이 부천공장에서 64K 메모리를 만들어낸 것은 대외적으로 이 회장이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신감과 용기를 얻은 계기가 되었다. 삼성은 무서운회사다. 삼성을 비웃고 내려다보던 일본 사람들도 더는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형 반도체 사업을 우려했던 간부들도 할말이 없어졌다. 이들은 일본 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놀랐다. 이 회장은 크게 점수를 땄다. 누구도 모르던 64K 디랩을 선택한 것은 이병철 회장만이 할수 있는 용단이라고 감탄했따.. 사실은 현재 정주영 회장 덕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디랩의 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그룹 총수의 신통한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미화되었다.
64K 디램 시제품이 나오자 이병철 회장은 마음놓고 돈주머니를 풀었다. 현대 정주영 회장 역시 같은 메모리를 목표로 밑빠진 독에 물붓듯이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정 회장의 스타일이다. 정주영 회장은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이병철 회장은 현대에 질수 없다는 일종의 오기로 올인 전략을 폈다. 이렇게 메모리판에서 두 그룹의 운명을 건 정주영 대 이병철의 기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으로 메모리 한 부분에 막대한 자본이 집중되었고, 이 경쟁이 도리어 오늘날과 같은 메모리 왕국의 원동력이 되어 튼튼한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삼성은 그동안 막대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이제 반도체 정규 코스에 들어섰으나 현대는 초보 과목에 등록을 마친 상태에 불과했다. 얼마후 정회장은 반도체 과목에서 낙제를 하고 물러났다. 오늘날 반도체 업계에서는 정 회장의 실패는 알아도 그의 공헌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국의 반도체 메모리 왕국 건설의 공신은 나름 아닌 현대 정주영 회장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메모리에서 현대를 크게 앞지르자 삼성은 이번엔 우리도 자동차를 하겠다고 현대와 자동차 싸움판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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